얼마 전에 오평선 선생의 <꽃길이 따로 있나, 내 삶이 꽃인 것을>을 읽었는데 자꾸 이 책을 들춰보게 된다.
분명히 내 눈으로 책을 읽고 있는데 자꾸 옆에서 오평선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기분이 든다.
누구나 알고 있는 말을 한다.
그것도 두 번 세 번 반복한다.
사랑해라. 가족이 중요하다. 건강 잘 챙겨라. 괜찮다. 뭐 이런 말들이다.
그런데 말 속에 뼈가 있다.
그냥 흘려 들을 말이 아니다.
찬찬히 음미해 볼 말이다.
열심히 살았던 사람의 말이다.
죽음의 문턱에까지 다녀온 사람의 말이다.
멈추고 내려놓은 사람의 말이다.
한 페이지에 마음이 멈췄는데 그다음 페이지를 넘기니 또 거기서도 마음이 멈춘다.
그래서 자꾸 들춰보게 된다.
오늘은 오평선 선생의 글 2편을 음미해 본다.
이삼십 대, 불안하다.
계속 달리지 않으면 뒤처지고
세상이 세워둔 줄에서 이탈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쉬지도 못하고 계속 달리고 달린다.
어디쯤 왔나 뒤돌아보는 것조차 사치다.
미래에는 이보다 나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로 견딘다.
사오십 대, 그다지 안정은 없다.
여전히 생존과 강제이탈의 경계에서 외줄 타기를 하며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가슴 졸이며 산다.
문득문득 가슴 한편이 답답해진다.
무엇을 위해, 언제까지 쫓기듯이 살아야 할까.
버거움이 가슴을 짓누를 때면
세상이 잠시 멈춰 나를 기다려줬으면 한다.
허나 세상은 절대 나를 위해 멈춰주지 않는다.
그러니 멈추고 싶다면 스스로 멈춰야 한다.
세상이 세워둔 줄에서 내려와 숨을 고르고
내게 알맞은 속도에 맞춰 다시 걸어가보자.
세상이 나만 빼놓고 달려갈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들지 모르지만
그 생각은 결국 내가 만들어낸 것이다.
나만의 시계를 만들어 나만의 시간을 가지면
다른 이의 등 뒤가 아니라
나를 위한 세상을 보며 걷게 될 것이다.
☞이삼십 대 때의 불안을 떠올려 본다.
그때는 모든 게 불안했다.
미래, 진로, 사람과의 만남...
막연한 기대로 견뎠다.
어른이 되면 나아질 거라고, 사오십 대가 되면 더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면서.
사십 대를 지나고 오십 대를 지나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이룬 것은 없고 안정은 아직 먼 것 같다.
시간이 좀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
세상이 좀 멈춰줬으면 좋겠다. 나를 위해서.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멈출 게 아니라, 세상이 멈출 게 아니라 내가 멈춰야 한다.
잠시 멈춘다고 해서 인생 끝나는 것 아니다.
괜한 불안에 사로잡히지 말자.
불안이 나를 사로잡으려고 하는 이유가 있다.
불안이란 그 놈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나를 잡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에 불안이 나를 잡는 것이다.
분주하게 돌아가는 일상의 톱니바퀴에 낀 채로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 바로 굴뚝이다.
삶의 에너지가 불타면서 나오는 연기를
적절히 배출하고 신선한 공기를 공급해줄 굴뚝.
그 굴뚝이 막히면 그 연기를 마시는 사람은
결국 나와 내 가족이다.
당신에게는 굴뚝이 있는가.
희뿌연 연기 속에 내일이 며칠인지도
가족이 어디쯤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시꺼먼 연기를 집 밖으로 내보내고 맑은 공기가 집 안에 들어오게 하는 게 굴뚝이지.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전 세계에 공통적으로 있는 걸 보니까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만들었는지 모른다.
가끔 굴뚝이 막히는 집이 있었다.
굴뚝이 막히면 시꺼먼 연기가 방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식구들이 방 밖으로 뛰쳐 나간다.
엄동설한에 밖에서 오돌오돌 떨어야 한다.
굴뚝 하나 막혔을 뿐인데 온 식구가 개고생을 한다.
가스가 들어오고 전기가 들어오면서 굴뚝이 뚝 사라졌다.
집에는 굴뚝 하나는 있어야 하는데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굴뚝이 뭐 따로 있나?
내가 굴뚝 아니겠는가?
내가 막히면 집식구들 개고생이고
내가 트이면 집식구들 환하게 웃는 걸 보니
내가 우리 집 굴뚝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