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 동안 책읽기 운동을 하면서 생긴 현상이 있다.
내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긴 책이 있으면 그 작가의 또 다른 책을 보게 되는 것이다.
국내 작가의 책들도 그랬지만 국외 작가의 책들도 그랬다.
어떻게 보면 그 작가의 팬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몇 년 전에 조금 더 공부할 마음이 있어서 대학원 입시 원서를 냈다.
입시 면접관이었던 교수님 한 분이 나에게 물었다.
석사 과정 마친 후 15년 넘게 공부를 쉬었는데 다시 할 수 있겠냐고.
그때 내 대답이 그랬다.
15년 넘게 학교 공부는 안 했지만 다른 공부를 많이 했다고.
1년에 200권 읽기 운동을 계속하면서 다양한 공부를 했다고.
그랬더니 최근에 읽은 책 중에 인상 깊은 책이 뭐냐고 물으셨다.
나는 딱히 어떤 책이라고 꼽을 수는 없지만 유발 하라리의 책들은 다 읽었다고 했다.
언젠가 브런치에 쓴 적도 있다.
유발 하라리는 책을 쓰고 나는 그의 책을 다 읽어 버릴 거다.
개인적으로 일본 작가들의 책은 읽기 싫어한다.
그렇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요시모토 바나나, 히가시노 게이고, 나쓰메 소세키, 다자이 오사무의 책들은 꽤 읽었다.
<빙점>의 작가인 미우라 아야꼬의 책들도 거의 다 읽었다.
한 번 꽂히기가 어려울 뿐이지 한 번 꽂히면 그다음에는 그 작가의 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런 현상은 비단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닐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을 거다.
소설만 그런 것도 아니다.
시도 그렇다.
문학 장르만 그런 것도 아니다.
다른 분야의 책도 그렇다.
그 작가의 글에 매료되고 그 작가의 생각에 몰입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내가 이미 읽었던 작가가 새로운 책을 냈다고 하면 자동적으로 그 책을 찾게 된다.
<불편한 편의점>의 김호연 작가의 새 책인 <나의 돈키호테>를 선뜻 읽은 것도, 이덕일 선생의 역사책들을 즐겨 읽는 이유도 바로 이런 연유이다.
이런 나에게 최근에 한 작가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로 잘 알려진 움베르토 에코이다.
밀리의 서재에서, 교부문고에서 우연히 그의 책 <중세>를 봤다.
어라?
이 책이 나에게 도전장을 던지는 것 같았다.
‘너 이 책 한 번 읽어 볼래?
쉽지 않을 걸?’ 이런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한 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옆에 숫자가 있었다.
중세 1, 중세 2, 중세 3, 중세 4.
무려 4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럽의 중세시대라고 할 수 있는 476년부터 1500년까지의 일들을 총망라해서 정리한 것 같았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세시대에 대해서 공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하겠지만 움베르토 에코는 과감히 도전장을 건넸다.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대비하려면 과거를 알아야 한다고.
좋다.
그 도전장을 기쁘게 받기로 했다.
유발 하라리의 책을 읽을 때와 같은 마음이었다.
당신은 써라 나는 읽는다.
막상 마음은 그렇게 먹었지만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일단 책값이 비싸다.
한 권 당 8만 원에 육박한다.
4권이면 32만 원이다.
할인을 받아도 28만 원이 넘는다.
책의 분량도 만만치 않다.
1권 당 1천 페이지 정도 된다.
4권을 합치면 4천 페이지이다.
이문열의 <삼국지> 10권보다 더 많은 분량이다.
박경리의 <토지>나 마르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었을 때처럼 긴 호흡이 필요하다.
꽤 읽은 것 같은데 좀처럼 줄어드는 것 같지 않다.
그래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언젠가 책걸이할 날이 올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중세를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 기대를 갖지도 않는다.
책장을 넘기면 넘긴 책장의 내용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어떤 느낌 같은 것들이 쌓일 것이다.
먼지 같은 그것들이 쌓이면서 중세를 이해하는 나만의 지도가 그려질 것이다.
그렇게 나는 도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