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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May 31. 2024

시대를 바라보는 작가들의 시선

 

소설은 이야기이지만 일어날 것 같은 이야기이다.

실제 있었던 사건을 모티프로 삼기도 한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그 시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 시대에는 역사적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고 그 시대에는 어떤 문화 전통을 간직하고 있었는지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가늠하게 된다.

소설 속에 그 시대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을 많이 읽다 보면 저절로 역사 공부가 된다.

나는 박경리의 <토지>를 읽으며 동학혁명 이후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공부했다.

조정래의 <아리랑>을 읽으며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한 줌 흙으로 산화한 분들을 기억하게 되었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으며 식민지 소시민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처럼 소설은 나에게 큰 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위대한 소설가들을 많이 배출한 나라는 자연스럽게 국민들에게 좋은 교육을 제공하게 되는 셈이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보면 영국은 너무나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나라이다.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작가들이 너무 많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인 셰익스피어, <올리버 트위스트>와 <크리스마스 캐럴>로 아이들에게까지도 잘 알려진 찰스 디킨스, <동물농장>과 <1984년>을 써서 시대를 관통하고 미래를 예견했던 조지 오웰, 바다 건너 아일랜드 태생으로서 <율리시스>라는 대작을 남긴 제임스 조이스, <인간과 초인>을 쓴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 등이 있다.

영국에는 위대한 여성 작가들도 많다.

글 쓰는 일이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시절도 있었지만 <오만과 편견>의 제인 오스틴, <폭풍의 언덕>의 에밀리 브론테, <제인 에어>의 샬롯 브론테, <등대로>의 버지니아 울프 등은 범접할 수 없는 위인들이다.




소설가들이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는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라는 책에 쓰인 문장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이 책은 프랑스혁명을 배경이 발발할 당시 런던과 파리의 두 도시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시민혁명으로 인해서 이전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그 시대를 찰스 디킨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최고의 시간이면서 최악의 시간이었다.

지혜의 시대였지만 어리석음의 시대이기도 했다.

믿음의 신기원이 도래함과 동시에 불신의 신기원이 열렸다.

빛의 계절이면서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었지만 절망의 겨울이기도 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다가도 모든 것을 다 잃은 것 같았다.

다 함께 천국으로 향하다가도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지금도 물론 그런 식이지만, 언론과 정계의 목소리 큰 거물들은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그 시대가 극단적으로만 보여지길 원했다.”




위대한 작가들은 시대의 아픔을 직시하였다.

어둠을 외면하지 않았다.

대낮의 밝음만 이야기하지 않았다.

한밤의 캄캄함도 이야기하였다.

작가들은 잔칫날의 풍악 소리를 들으며 춤을 출 줄도 알았고 초상집의 곡소리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그들은 시대를 탓하지 않았다.

운명을 핑계하며 하늘을 향해 저주의 말을 쏟아내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 시대 안에서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 몸부림이 천국으로 가는 것처럼 보였고 또 다른 이들에게는 그 몸부림이 지옥으로 가는 것처럼 보였다.

시대 자체는 잘한 것도 없고 잘못한 것도 없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시대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좋은 시대라고도 할 수도 있고 안 좋은 시대라고도 할 수도 있을 뿐이다.

작가들은 그 점을 다양한 말로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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