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6시가 되면 동사무소의 확성기에서 “잘살아 보세”라는 노래가 울려 퍼졌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도 잘살고 싶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나에게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잘살 수 있다고 하셨다.
선생님이 나에게 잘사는 법칙을 알려주실 줄 알고 선생님 말씀을 잘 들으려고 노력했다.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집중하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 잘살 수 있다고 하셨다.
비로소 잘살기 위한 법칙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 법칙은 바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가장 공부를 잘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잘사는 삶을 사는 것 같지 않았다.
내가 더 열심히 공부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삶을 사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비록 늦기는 했지만 또 공부하기로 했다.
평생공부라고 했으니까 평생 공부를 하다 보면 언젠가는 잘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조상들은 인생은 평생 공부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오죽했으면 죽은 사람의 위패에 ‘학생(學生)’이란 말을 넣을 정도였다.
잘사는 법칙이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라는 말이 통할만 했다.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은 잘살게 될 것이라는 그림이 그려지기도 했다.
좋은 성적을 거두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줄 알았다.
이런 게 삶의 법칙인 줄 알았다.
1 더하기 1은 2가 되는 것처럼 삶에도 어떤 법칙이 있어서 그 법칙을 따르면 잘살게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분명 나보다 공부를 잘했던 사람인데 나보다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었다.
나보다 공부를 못했던 사람인데 나보다 나은 삶을 사는 사람도 있었다.
‘이게 뭐지?’ 공부를 열심히 하면 잘살게 된다는 삶의 법칙이 깨어지는 순간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발명왕 에디슨이 어렸을 때 1 더하기 1은 2가 아니라 1이라고 우겼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진흙 두 덩이를 합쳤더니 한 덩어리의 진흙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1 더하기 1은 1이라고 우겼던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서 새로운 법칙을 볼 수 있었다.
1 더하기 1은 2가 아닐 수도 있다는 법칙 말이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잘산다는 법칙이 들어맞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 말이다.
수소(H) 2리터와 산소(O) 1리터를 합치면 총 3리터의 질량이 될 것이다.
1 더하기 1은 1의 법칙대로라면 당연히 3리터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수소 2리터와 산소 1리터를 합치면 3리터가 아니라 2리터가 된다.
뿐만 아니라 수소도 아니고 산소도 아닌 전혀 새로운 물질인 물(H2O)이 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신기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
세상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법칙들로 가득 차 있다.
삶도 그렇다.
허구한 날 사고를 치고 문제를 일으키는 자녀가 있는가?
그래서 속이 상한가?
그러면 사고를 치고 문제를 일으키는 자녀가 없으면 잘살게 되는 것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사고를 치고 문제를 일으키더라도 내 새끼가 있는 게 나을 수 있다.
대부분은 그럴 것이다.
또 누가 아는가?
그렇게 사고를 치고 문제를 일으키는 자녀가 나중에 큰 사업가가 되고 크게 효도하는 자녀가 될지.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삶을 관통하는 법칙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다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수소 두 개와 산소 하나가 만나 물 두 개가 되는 것처럼 우리 삶이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법칙에 이끌려 새로운 삶으로 변화될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은 끝까지 살아 보아야 한다.
“이번 생은 망했어.”라는 말 같은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망한 게 아니라 새로운 삶의 법칙을 경험하는 중일 것이다.
우리 삶에는 우리가 모르는 법칙들이 너무나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