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고단, 연하천, 벽소령, 세석, 장터목, 치마골.
지리산 화대종주 구간에서 만날 수 있는 대피소들이다.
2박 3일 일정으로 산행을 한다면 첫날에는 연하천에서 묵고, 둘째 날에는 장터목에서 묵으면 좋을 것이다.
그러면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되고, 조금 걷다가 조금 쉬면서 지리산 곳곳의 풍광을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을 것이다.
산이 좋다고 해서 아무 데서나 잠을 잘 수는 없다.
가끔 비박을 한다며 텐트까지 챙겨서 오는 사람들도 있는데 국립공원에서는 비박을 금하고 있다.
반드시 대피소에서 묵어야 한다.
산행 전에 대피소 예약은 필수이다.
뿐만 아니라 야간산행도 금하고 있다.
산행이 가능한 시간은 하절기의 경우 새벽 3시부터 저녁 7시까지이다.
그런데 이 시간을 지키지 않고 한밤중에 몰래 탐방로에 들어서는 사람들도 많다.
나름 산을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안전한 산행이 되려면 지킬 것은 지켜줘야 한다.
지리산 정상인 천왕봉에서 제일 가까운 대피소는 장터목이다.
장터목에서 천왕봉까지는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치밭목대피소에서는 2~3시간을 올라가야 천왕봉에 이른다.
세석대피소에서 천왕봉까지는 잰걸음으로 걸어도 3~4시간이 걸린다.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기 원한다면 장터목대피소에서 묵은 후에 새벽 4시 정도에 정상으로 출발하면 된다.
벽소령대피소에서 묵을 생각을 하는 순간 천왕봉 일출을 보는 것은 포기했다.
산 정상에서 일출을 보려면 날씨도 도와줘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체력이 받쳐줘야 한다.
12년 전에 지리산 종주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장터목에서 묵었으면서도 천왕봉 일출을 보지 못했다.
잠자리에서 눈을 떠 보니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올라 있었다.
작년에도 벽소령대피소에서 묵었기에 천왕봉 일출은 볼 수 없었다.
올해는 어떻게든 시도해 보려고 했는데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오후 3시를 조금 지나 벽소령대피소에 도착했다.
대피소 입실시간은 오후 3시부터이다.
대피소를 지키고 있던 안내요원에게 빈자리를 하나 달라고 했다.
두 다리에 경련이 나서 더 이상 걷기 힘들다고 했다.
그이는 친절하게도 장터목에 예약한 나의 자리를 벽소령으로 옮겨주었다.
벽소령대피소는 경치가 참 좋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다른 대피소에 비해 물이 적다는 것이다.
흐르는 물이 있으면 얼굴도 씻고 수건에 물을 적셔서 땀에 절은 몸도 닦아줄 수 있는데 벽소령대피소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대충 닦고 바람에 땀을 식힌 후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내 자리인 1층 18번 자리에 누웠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몸이 굉장히 피곤했었나 보다.
1시간 넘게 잠을 잔 후에 웅성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사람들의 꽤 많이 도착해 있었다.
저마다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도 코펠과 버너를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쌀을 씻고 먼저 밥을 지었다.
2컵 분량의 쌀을 모두 부었다.
대피소에서 햇반을 판매하기는 한다.
하지만 나는 밥을 지어먹는 게 좋다.
저녁 메뉴는 참치김치찌개로 정했다.
거기에 라면 사리 하나.
다른 반찬은 준비하지 않았다.
작년에는 삼겹살도 가지고 왔는데 올해는 단출하게 식사하기로 했다.
막상 산에 오르면 지쳐서 많이 먹지도 못한다.
다른 사람들은 뭘 먹는지 살펴보았다.
역시 공통의 메뉴는 라면이었다.
삼겹살을 구워 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즉석 식사와 전투식량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식사 후에는 두루마리 휴지로 식기를 깨끗하게 닦았다.
설거지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휴지로 닦는 게 최선이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양 백 마리를 세기도 전에 스르르 잠이 들었다.
벽소령의 온도는 30도를 밑돌더니 금세 20도까지 내려갔다.
한밤의 벽소령은 이미 가을의 문을 드나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