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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Aug 13. 2024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억압에서 해방된 지 79주년이 되는 광복절을 앞두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는 군사력을 앞세워 1905년에 우리나라에 을사보호조약을 맺게 하였고, 1910년 8월 29일에 우리나라의 주권을 강도질하는 병탄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마치 우리가 일제와 평화롭게 조약을 맺었다는 듯이 한일합방이라느니 한일병합이라느니 하는 말로 근 35년 동안 우리를 교육시켰다.

나도 어렸을 때는 한일합방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역사를 조금 들여다보니 고종황제 때부터 합방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병탄이라고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강제로 나라를 빼앗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맞이하게 되기까지 우리는 34년 11개월 17일 동안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겼다.

어떤 사람들은 36년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35년이라고 한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하지만 단 하루라도 주권을 빼앗긴 것은 억울한 일이다.

정확하게 계산을 해봤더니 34년 11개월 17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34년이라고 하고 싶다.




이 34년 11개월 동안 얼마나 많은 우리의 동포들이 희생을 당했는지 모른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단 한 번도 희생자들의 숫자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이 희생을 당했기 때문이다.

전쟁터에 끌려간 징병자들, 광산촌과 토목시설장에 끌려간 징용자들, 그리고 일제에게 성적으로 유린당한 수많은 위안부들의 숫자는 일일이 셀 수가 없을 정도이다.

유대인들은 1933년에서 1945년까지 나치 치하의 12년 동안 홀로코스트에서 600만 명가량이 희생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일제에 의해서 희생당했다.

내일이 내 차례일까, 모레가 내 차례일까 두려움 가운데서 그 긴 시간을 보냈다.

일제는 일본인을 1등 국민이라고 했고 우리나라 사람들을 2등 국민이라고 했다.

그리고 2등 국민에게는 함부로 대해도 괜찮다고 여겼다.

맑은 정신의 소유자였던 젊고 건강한 윤동주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지만 일제는 죽음의 원인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어렸을 적에 내 아버지는 툭하면 나에게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라는 말씀을 들려주셨다.

모든 사람은 그 생명에 있어서 평등하다는 말씀이었다.

귀족이라고 해서 목숨을 2개, 3개 가지고 사는 게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의 목숨이 가난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일제는 우리의 목숨을 너무나 함부로 대했다.

그들이 만든 법이 그래도 괜찮다고 했다.

조선인들의 목숨은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1923년 9월 일본 관동지방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는데 일본인들은 그 지진을 틈타서 당시 일본에 있던 조선인들을 처참히 살육하였다.

짧은 시간 동안 조선인 6천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암울한 때에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을 펼친 분들이 있었다.

그들도 누군가의 아들이요 딸이었으며, 누군가의 남편이고 부인이었으며,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였다.

그들도 자신의 목숨이 아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아낌없이 목숨을 바쳤다.

더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감사하게도 79년 전에 우리는 해방을 얻었다.

자유를 얻었고 우리의 주권도 되찾았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사람의 생명이 가차 없이 여겨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자기보다 힘이 없는 친구를 괴롭히는 학생은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자기보다 돈이 없는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생명을 귀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다.

자기보다 직급이 낮다고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이다.

자기보다 실력이 없다고 무시하는 사람은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경시하는 사람이다.

모든 것을 법으로 해결하려는 사람은 굉장히 합리적인 것 같지만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사람의 생명을 고려하지 않는 인정 없는 사람이다.

다시 한번 아버지의 교훈을 떠올린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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