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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Aug 10. 2024

1박 2일 지리산 화대종주(8)-화대종주를 마치다

 

천왕봉 정상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았다.

거기 그냥 머무르고 싶었다.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전히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산리로 내려갈까, 대원사로 내려갈까.

결정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었다.

발걸음이 대원사로 향했다.

대원사 일주문까지는 11㎞ 넘는 길이다.

내리막길이라고 하지만 무척 힘든 길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다.

가 보지 않은 길이니 그 힘들다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미 몸은 많이 망가진 상태이다.

오른쪽 엄지발가락에는 물집도 생긴 것 같았다.

그래도 내리막길이어서 그런지 걸음이 빨라졌다.

15분쯤 내려왔을까?

갑자기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왔다.

중봉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산을 내려오다 보면 안다.

내리막길이라고 해서 정상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건 추락이다.

내려가는 길도 올라가는 길 못지않게 업다운이다.

아니 다운업의 길이라고 하겠다.




어떤 사람은 산을 오르는 것보다 산을 내려가는 게 더 힘들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중봉을 오르면서 너무 힘들어서 곁에 있는 분에게 물었다.

중봉이 정말 힘들다고.

그랬더니 그분이 하는 말이 명언이었다.

“그래도 천왕봉에 오르는 게 제일 힘들지요.” 

그렇다. 

지리산의 모든 봉우리들은 천왕봉으로 향한다.

천왕봉을 오르는 길이 어디서부터 시작인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사람들은 자신이 있는 곳에서부터 천왕봉으로 오른다.

나는 이번에 화엄사에서 시작했지만 성삼재에서 시작한 사람도 있고, 백무동이나 중산리에서 시작한 사람도 있고 대원사에서 시작한 사람도 있다.

힘든 봉우리들을 여럿 만나지만 그 모두가 천왕봉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나는 내려가는 길에 서 있지만 이 길이 누군가에게는 올라가는 길이다.

나에게는 쉬운 하산길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힘겨운 등산길이다.

길은 같은데 사람에 따라 그 길이 달리 보인다.




하산길이 만만치는 않았는데 그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까마득하게 올라가야 한다.

그들에 비하면 천왕봉을 찍고 내려오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중봉을 지나서 쓰러질 것만 같을 때 치밭목대피소에 들렀다.

아직 대피소 체크인 시간이 아니어서 인기척이 없었다.

시원한 물을 마시고 대피소 앞 그늘에 드러누웠다.

모기가 날고 벌이 날아다녔지만 쫓을 기력도 없었다.

눈을 떴을 때는 한 시간가량 지난 후였다.

기절한 듯이 잠을 잔 것이다.

후다닥 배낭을 챙기고 다시 출발했다.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동안 근육경련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수면 부족과 겹쳐서 나타난 증상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단잠 덕분에 1시간가량은 신나게 내려갔다.

그 후 다시 몸이 무거워졌지만 이미 상당히 내려온 상태였다.

그때부터는 500미터마다 나오는 표지목을 세면서 점점 희망을 키워나갔다.




물소리가 커지고 경사도가 낮아지면서 이제 거의 다 내려왔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탐방로 차단기가 보였다.

다 내려왔다!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였다.

좌우로 민박집이 하나씩 보이더니 곧 마을이 나타났다.

눈에 들어오는 식당에 들러 산채비빔밥을 한 그릇 주문했다.

식당 앞 계곡에는 여름휴가를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물을 첨벙거리며 깔깔 웃어대는 아이들의 소리가 시원하게 들렸다.

지리산의 선물이다.

대원사 일주문을 지나고 주차장으로 내려오면서 잠시 눈을 들어 산을 바라보았다.

저 산 어딘가에 나의 발자국이 남아 있을 터였다.

이 더위에 어쩌자고 산에 갔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뭐라고 할까?

영국의 탐험가 조지 말로리처럼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고 할까?

그것보다는 “여름에는 지리산에 가야죠. 이유는, 지리산이니까요.”라고 하는 게 낫겠다.

이렇게 1박 2일의 지리산 화대종주를 마쳤다.

대원사 쪽 지리산 탐방로 출입 차단기 앞에 도착! 무사히 하산하였다.
대원사, 그리고 대원사 일주문. 작년까지는 화대종주 구간별 스탬프를 찍는 종주 인증제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다.
지리산의 선물은 뭐니뭐니 해도 맑은 계곡물 아닐까? 저 물에 푹 빠지고 싶었다.
저 산 어딘가에 나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이틀 동안 참 많이 걸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4만 걸음 넘게 걸었다.
GPS 어플 <산길샘>이 기록해 준 나의 지리산 화대종주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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