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을 정리하고 고향에 내려가서 살고 있는 분이 있다.
오랜만에 그분과 가깝게 지내던 분들을 모아 함께 방문하였다.
점심시간이 다 되었기에 집에 오기 전에 식당에서 식사 먼저 하자고 하셨다.
알려준 주소의 식당에 가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서빙하는 아주머니가 우리 식탁에 반찬을 진열하고 있었다.
우리를 초대한 그분이 "어머! 눈이 참 예쁘시네요."라고 하셨다.
누구를 보고 하는 말인지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서빙하는 아주머니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두 분이 친한 사이인가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날 처음 보는 아주머니라고 했다.
서빙하는 아주머니가 얼굴에 웃음을 띠며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분은 그 후에도 두세 번 더 눈이 초롱초롱하고 맑다며 눈이 참 예쁘다는 말을 계속 하셨다.
서비스를 잘 받으려고 일부러 좋은 말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식사를 하면서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분은 사람을 만나면 상대방의 예쁜 모습이 먼저 보인다고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은데 자신은 그렇다고 한다.
미인이 아니어도 얼굴을 보면 예쁜 구석이 보인다고 한다.
얼굴이 아니면 손, 그것도 아니면 말투 등 어쨌든 상대방의 예쁜 모습이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보이는 부분을 이야기해 준다고 한다.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분은 사업을 하면서 이들을 많이 본 분이어서 아쉬운 게 별로 없으시다.
나처럼 경제적인 여유가 별로 없는 사람은 식당에서 서비스로 제공해 주는 음식이 있으면 좋아라 하지만 그분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먹고 싶으면 더 시키면 되니까 말이다.
손님으로 앉아 있으니까 종업원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식당에서 식사할 때면 종업원에 가능하면 한마디라도 칭찬의 말을 해 준다고 한다.
세상에 별별 사람이 다 있지만 이런 분이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식당에서 일부러 큰소리치는 사람 측에 속한다.
다른 사람의 예쁜 면을 보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부족한 면을 더 잘 본다.
누가 대단한 일을 해도 나는 그 사람이 한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말은 축하한다고, 대단하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그 정도쯤이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 사람을 대한다.
솔직히 나는 경쟁심이 많아서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면 배가 아프다.
시기심이 많고 남보다 내가 잘 되기를 바란다.
그러니 칭찬에 인색하게 살아간다.
아마 지금까지 나를 만났던 사람들 중에는 나의 경쟁심과 시기심 때문에 상처를 입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나도 내가 이런 사람인 것을 안다.
고쳐야 하는 심보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 쉽사리 고쳐지지 않는다.
예쁜 사람 눈에는 예쁜 것이 보이고 미운 사람 눈에는 미운 것이 보일 텐데 나는 미운 사람인가 보다.
그날 내내 그분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어머! 눈이 참 예쁘시네요.”
다른 사람의 예쁜 점을 볼 수 있다면 그 눈은 참 아름다운 눈일 것이다.
다른 사람의 예쁜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 귀는 참 아름다운 귀일 것이다.
칭찬 한마디가 사람에게 얼마나 좋은 영향을 끼치는지는 잘 알고 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도 있었다.
그래서 나도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잘 안 된다.
습관이 안 되어서 그런가 생각했다.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칭찬하는 것은 습관이 아니고 본능이요 본성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본성이 착한 사람이 남을 잘 칭찬하는 것 같다.
내가 남에게 칭찬을 잘 못하는 것은 내 본능과 본성이 착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욕심과 질투가 많고 남을 무시하는 본능과 본성을 가진 자가 바로 나인 것 같다.
부러웠다.
칭찬하는 입술을 가진 그분이 한없이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