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는 자기만의 영역이 있다.
박수용 감독의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을 보면 암호랑이의 영역은 400평방미터 이상이고 수호랑이의 영역은 암호랑이의 영역보다 4배나 더 넓다고 한다.
그 영역 안에 다른 호랑이가 들어오면 결투를 벌인다.
살려두지 않는다.
싸움에서 지면 영역을 뺏긴다.
이렇다 보니 호랑이는 다른 호랑이에게 미안한 감정이 없다.
미안해하면 지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사람도 자기만의 영역이 있다.
그러나 그 영역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게 만든다.
그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사람은 관계적인 존재이고 사회적인 존재이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좌충우돌한다.
잘 통제된 컴퓨터 시스템이라면 부딪힐 일이 없겠지만 사람은 부족함투성이이기 때문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괜찮다며 용서해 준다.
사과와 용서가 인간관계를 가능케 한다.
그런데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다 용서해줘야 하는가?
그건 아니다.
용서하는 것도 사람에 따라 다르고 상황에 따라 다르다.
매번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용서해준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의 자존심을 무너뜨린 사람을 용서해주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했다고 해서 상대방이 반드시 용서해줘야 하는 것도 아니다.
미안한 일을 저질렀다면 그에 맞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대가가 없으면 용서도 쉽지 않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잔혹한 말은 아니다.
네가 나의 눈을 하나 뺐으니 나도 너의 눈을 하나 빼겠다는 것이다.
갑자기 눈이 뽑혔을 때 그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용서해서 눈 하나만 뽑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눈에는 눈이라는 말이 굉장히 너그러운 말처럼 들린다.
보복하려는 말이 아니라 용서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말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사람을 얼마나 용서할 수 있을까?
예수에게 한 사람이 물어본 적이 있다.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면 되겠냐고.
그때 예수의 대답은 상상을 초월한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다.
단순히 계산해서 490번이라는 말이 아니다.
끊임없이 용서하라는 말이다.
사랑이 많은 예수니까 그랬을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한두 번 용서하면 끝이다.
그다음에 또 반복해서 잘못을 저지르면 그때는 용서 없다.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은 큰일에는 용서하지 않는다.
자잘한 일들이야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용서하기도 쉽다.
하지만 큰일은 용서할 수가 없다.
내가 두 살 때 내 아버지는 이웃에게 보증을 서줬다가 전 재산을 날렸다.
그 사람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고 하셨다.
용서할 수가 없으셨을 것이다.
만약 나에게 그런 일을 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용서 못 한다.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역사 속에는 용서의 대인배들이 있다.
중국 춘추시대에 장왕이 그러하다.
하루는 장왕이 잔치를 벌여 신하들을 치하했다.
밤이 깊었는데 갑자기 잔치자리의 촛불의 꺼졌다.
그때 누군가 장왕의 여인에게 손을 댔다.
여인이 깜짝 놀라며 그 신하의 갓끈을 잡자 갓끈이 끊어지고 말았다.
여인은 곧바로 장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전하, 방금 어떤 자가 어두운 틈을 타서 제 옷을 끌어당겼습니다.
제가 그 자의 갓끈을 가지고 있으니 불을 켜시거든 갓끈이 끊어진 자를 잡으소서.” 그 말을 들은 장왕은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여봐라. 오늘처럼 즐거운 날에 갓끈이 끊어질 정도로 취하지 않는 자는 잔치를 제대로 즐기지 않은 것으로 여길 테니 그리 알라.”
그러자 신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갓끈을 끊고 잔치를 즐겼다고 한다.
장왕은 그 신하를 찾아서 죽일 수도 있었지만 용서를 베풀었다.
이후 그 신하는 장왕을 어떻게 대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