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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Sep 15. 2024

모두가 평안한 추석 명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추석을 앞둔 일요일이다.

예배를 드리려고 교회에 갔는데 고향에 갔다 오느냐고 묻는다.

이번에도 고향에 못 간다고 했다.

명절이지만 고향에 못 갈 때가 훨씬 많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게 나의 처지다.

나 말고 고향에 못 가는 형편인 사람이 또 있나 봤더니 꽤 있었다.

고령의 어른들의 경우는 이제 고향에 다녀오시기가 어려워지셨다.

이제는 자손들이 이곳 분당으로 찾아온다.

나보다 어린 사람들의 경우는 오히려 고향이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인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오늘 우리 교회에도 낯선 사람들이 많이 왔던데 아마 추석을 맞아 부모님을 방문했다가 함께 교회에 나왔을 것이다.

이런 분들에게 고향은 자동차로 몇 시간을 달려야 도착하는 시골집이 아니라 도회지의 시멘트로 지어진 아파트일 것이다.

고향의 이미지가 많이 달라졌다.

고향은 태어나 자란 곳이기보다 아버지 어머니가 계신 곳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내 옆에 앉으신 할머니는 고향이 황해도 옹진이라고 하셨다.

지도를 찾아보니까 아슬아슬하게 38선 북쪽에 위치한 지역이었던 것 같다.

길만 열린다면 서울에서 두 시간이면 갈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길이 막혀서 갈 수가 없다.

그 할머니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시부모님을 모시고 갓난 아들 하나 들쳐업고 피난 나오셨다고 했다.

남편은 나중에 합류하기로 했는데 그게 남편과의 마지막이었다.

아직까지도 생사를 모르신다.

고향을 떠날 때 그 할머니의 나이 스물셋이셨다.

시부모님은 젊은 며느리가 핏덩어리를 두고 도망가 버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셨다고 했다.

밤에는 한쪽 팔에 끈을 묶어서 잠을 잤다고 했다.

그 끈의 저쪽 끝에는 시어머니가 묶여 있었던 것이다.

그때 업고 나온 갓난아기가 지금 70대 중반이 되었다.

“내가 우리 집의 큰딸이었어.”라고 말씀하시는 어르신에게 차마 고향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예배당의 한쪽 끝자리에는 베트남에서 오신 분이 앉아 있었다.

결혼 이민을 온 것인데 한국 생활이 10년 정도 되었다.

아들도 낳았고 딸도 낳았다.

얼굴에 베트남 사람이라는 표시가 없으니까 한국인과 똑같아 보인다.

하지만 말은 아직도 조금 어눌하다.

그래서 옆사람과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조용히 에배만 드리고 간다.

남편이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라면 베트남에도 자주 다녀올 텐데 그런 형편이 되지 않는다.

베트남도 추석 명절을 크게 쇠는데 얼마나 고향에 가고 싶을까?

그 이도 친정에서는 큰딸이라고 했다.

결혼하면서 친정 식구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거는 굉장한 결심을 한 것이다.

덕분에 부모님과 동생들의 삶이 조금 나아졌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은 명절에 고향에도 못 간다.

얼마 전 태풍 때문에 베트남에 큰 피해가 있었다는데 그 이의 친정은 괜찮은지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명절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연휴라고 한다.

누군가에게는 명절이고 누군가에게는 휴일의 연속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마음 아픈 기간이기도 하다.

그러니 명절 분위기, 연휴 분위기를 내더라도 마음 아픈 사람을 배려하면서 보냈으면 좋겠다.

어렸을 적 고향을 떠올려 보면 명절 분위기에서 빠지지 않는 모습이 하나 있었다.

우리도 배부르게 잘 먹었지만 동네에 가난한 집, 홀로 살고 있는 집에서도 잘 먹었다.

동네의 여러 집들이 십시일반 떡이며 과일이며 전과 고기를 싸서 그 집에 갖다주었기 때문이다.

이웃을 남이라 여기지 않고 먼 친척처럼 여겼던 것이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면 무슨 재미가 있겠냐는 마음이 통하던 시절이었다.

덕분에 한없이 외로울 수밖에 없는 사람도 평상시보다는 덜 외로운 시간으로 명절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고향 방문의 여부를 떠나 모두가 평안한 명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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