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실 행복의 연못에 풍덩 빠져 있다

by 박은석


대학시절에는 무슨 고민이 그리 많았는지 걸어 다니는 고민덩어리였던 것 같다.

군복무, 학업, 등록금, 취업과 진로, 그리고 연애. 청춘의 머리와 몸뚱아리로는 그 어느 것 하나 명쾌하게 해결하기가 어려웠다.


어느 토요일엔가 종로 한복판에 나왔다.

길 건너편에는 종로서적이 있었고 길 이편에는 YMCA건물이 있었는데 젊은이들이 이 두 곳을 약속장소로 많이들 삼았기에 그 근처는 늘 북새통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친구를 만나 큰소리로 악수하며 반가워하는 사람들, 연인을 만나 팔짱을 끼고 재잘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다 흥에 겨워 있었고 행복해 보였다.

종로는 그렇게 활기찬 곳이었다.


그런데 그 생기에 어울리지 않게 나는 잔뜩 굳어 있었다. 풀리지 않는 무엇인가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행복하지가 않았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괜히 얄미워졌다.

‘나는 심각한데 저 사람들은 뭐가 저렇게 행복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러웠다. 나도 그 사람들과 같은 행복을 가지고 싶었다.

그게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나 보다.

독일 시인 칼 부세가 <산 너머 저쪽>이라는 시를 썼는데 오래 전에는 학교 교과서에도 실렸었다고 한다.


“산 너머 언덕 너머 먼 하늘 밑에

행복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네.


아!

나는 친구 따라 찾아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돌아왔다네.


산 너머 언덕 너머 더욱 더 멀리


그래도

행복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네.”


100년도 훨씬 전에 쓴 시인데 아직도 많이 읊어지는 것을 보니 사람들의 마음은 비슷한가 보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원하고 행복을 찾아 떠난다.

행복할 것 같다면 산을 넘고 물을 건너기도 한다.


잉글랜드에서, 아일랜드에서, 네덜란드에서, 독일에서, 그 외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카로 넘어간 것은 행복을 찾기 위함이었다.

육지를 구경도 못한 채 죽어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을 때

“육지가 보인다!”하고 외치는 소리에 그들은 화들짝 놀라 일어났을 것이다.

수개월에 동안 바다만 바라보았던 사람들은 육지에 닿기만 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체코의 작곡가 드보르작은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에서 그 당시의 분위기를 잘 표현해주었다.


그러나 그렇게 바랐던 육지는 또 다른 시련의 땅이었다.

굶주림과 혹독한 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쓰러져갔다.




어떤 사람들은 힘들어도 고향땅에 있는 것이 행복이었다고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조금만 지나면 진짜 행복해질 것이라고 했을 것이다.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이 행복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벌써 행복에 풍덩 빠져 있는데 그것을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하루에 밥 한 끼만 먹어도 행복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살아 있다고 하는 전화 한 통만으로도 기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다.

엄마아빠의 손을 잡고 붕붕 하늘을 날아다니는 어린아이들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 한다.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동화 <파랑새>의 주인공 치르치르와 미치르는 파랑새를 찾아 기나긴 여행을 했지만 결국 찾지 못하여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바로 자기 집 새장에 파랑새가 있었다.


행복은 ‘저기, 언젠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내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 있다.


사실, 오늘도 나는 행복의 연못에 풍덩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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