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어른들이 아침이면 서로 인사로 나누는 인사말이 있었다.
"밤새 안녕하셨습니까?"이다.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는 시절이었으니까 '밤새'라는 시간은 길게는 저녁 여섯시에서 아침 여섯시 정도라 할 수 있다.
하루 스물네 시간을 둘로 나누면 낮과 밤으로 표현한다.
낮에는 밝으니까 나다니기에 좋다.
햇빛이 비치니까 사물을 분간할 수 있고 위험요소를 보고 피하기 좋다.
반면에 밤은 어두우니까 나다니기가 어렵다.
캄캄하니까 사물을 분간하기도 어렵고 위험 요소가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으니까 피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낮에는 밖에 나가 일을 하고 밤에는 안에 들어와 가만히 잠을 자는 시간으로 보냈다.
생각해 보면 밖에 쏘다니며 이런 일 저런 일 하며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만나고 지내는 낮시간보다 집에 가만히 누워서 잠을 잔 밤시간이 더 안녕했을 것 같다.
하지만 낮새 안녕했냐는 말은 없고 밤새 안녕했냐는 말만 있다.
밤 사이에 눈이 왔고 밤 사이에 비가 왔으며 밤 사이에 난리가 났고 밤 사이에 아이를 가졌고 밤 사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인류 역사의 큰일들은 대개 밤 사이에 계획되었고 발생했다.
그 시간들이 바로 역사의 밤이다.
지난주에는 밤새 큰 눈이 와서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었다.
어제는 밤새 뒤숭숭한 소식이 방송을 뒤덮어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날이 밝으면 어제와 같은 아침이 될 거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자고 나면 똑같은 아침을 맞이하는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어제의 아침은 어제의 아침이고 오늘의 아침은 오늘의 아침이다.
같은 아침이 아니다.
다른 아침이다.
날마다 새로운 아침을 맞이한다.
그리고 날마다 내일의 아침을 확신할 수 없다.
밤이 되어 잠을 자지만 아침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아침을 맞을 수 있는 사람은 밤새 살아남은 사람이다.
어쨌거나 안녕했기에 아침을 맞는다.
사람들이 저마다 대단한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꿈과 희망이라는 게 사실은 매우 단순한 것이다.
내일에도 오늘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오늘처럼 건강한 몸으로 내일 아침에 일어나고 오늘처럼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내일 아침에 가족들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들의 꿈이다.
밤새 안녕하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밤새 천하의 권세를 얻었다 하더라도 밤새 가족을 잃었다면 안녕한 게 아니다.
밤새 잭팟을 여러 번 터뜨렸다고 하더라도 밤새 건강을 잃었다면 절대로 안녕한 게 아니다.
밤새 안녕은 지금 이 모습을 아침에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대로의 풍경을 아침에도 볼 수 있는 거다.
별것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별것 아닌 게 사실은 대단한 것이다.
평범한 일상이라고 하겠지만 평범한 일상이 사실은 위대한 시간이다.
코로나19 시대였을 때, 집 밖으로 나가기 두려웠을 때, 사무실에서도 동료들과 거리를 두어야만 했을 때, 식당에서 테이블에 4명 이상 앉을 수 없었을 때, 길거리에서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해야만 했을 때,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괜히 겁을 집어먹었을 때, 그때의 소원은 단순했다.
일상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그때의 소원이었다.
일상을 회복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밤새 안녕하셨냐는 말이 단순한 인사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밤새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밤새 전염병에 감염되지 않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밤새 안녕이란 말이 피부로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코로나 시대가 지나면서 밤새 안녕은 당연한 줄 알았다.
하지만 밤새 안녕은 당연한 게 아니다.
기적이고 다행이고 축복이고 은혜이다.
이 밤에 우리 모두 다 밤새 안녕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