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살더라도 한평생인 것처럼 살라!”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가 한 말이다.
이 말이 마음에 들어서 메모를 하고 틈틈이 되뇌고 있다.
하루가 한평생이다.
어찌 보면 우리의 삶이 마치 하루살이의 삶처럼 들린다.
인생이 너무 짧게 느껴진다.
나이 계산을 해 보면 내가 벌써 이만큼 나이 먹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인생, 순간이다.
눈앞에 날아다니는 하루살이를 보면서 ‘저 녀석 지금 저렇게 촐랑대더라도 저녁이 되면 금방 죽을 텐데...’ 생각을 했었다.
근데 나에게는 금방인 하루가 하루살이에게는 기나긴 일생일 수도 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시인 고두현은 <별에게 묻다>에서 하루살이의 시간이 얼마나 상대적인지 알려준다.
“천왕성에선 평생 낮과 밤을 한 번밖에 못 본다.
마흔두 해 동안 빛이 계속되고
마흔두 해 동안은 또 어둠이 계속된다.
그곳에선 하루가 일생이다.”
낮과 밤이 합쳐서 하루라고 한다면 천왕성에서의 하루는 지구에서의 84년이다.
천왕성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도 몰랐던 그 옛날 그리스 철학자의 말이 헛소리가 아니었다.
하루가 한평생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하지만 세네카는 단순히 시간만을 계산한 것이 아니었다.
“하루를 살더라도 한평생인 것처럼 살라!”
이 말은 하루가 한평생인 것처럼 소중히 여기라는 말이다.
하루를 허투루 보낸다면 한평생을 날려버리는 것이다.
인생이란 작품은 하루하루의 획들이 모여서 완성된다.
하루의 붓칠을 망쳐버리면 다른 날 보완할 수가 없다.
그 다른 날은 그날의 붓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식은 밥은 오늘 남겨두었다가 내일 먹을 수 있지만 인생은 그럴 수 없다.
오늘의 삶을 아껴두었다가 내일 써먹을 수가 없다.
오늘은 오늘의 생이고 내일은 내일의 생이다.
오늘 하루가 한평생이고 내일 하루는 또 다른 한평생이다.
하루를 한평생처럼 생각하며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시간을 아껴서 치열하게 살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시간을 아껴서 많은 일을 이루어 놓으면 인생을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일을 많이 한 것으로 인생을 잘 살았다고 하면 오래오래 장수한 사람들이 인생을 잘 살았다는 축에 들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마흔 살도 살지 못한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유관순 열사는 인생을 잘 못 산 것인가?
비록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그 누구도 그들의 인생을 잘 못 산 인생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짧은 나이를 살았지만 그어 놓은 획이 너무 많은 날들을 살았기 때문이다.
한번 생각해 보라.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 중에서 기억에 남는 날이 과연 며칠이나 되는지.
날수로는 일만 날이 넘도록 살았는데 그 일만 날들 중에서 기억에 남는 날은 몇 날 안 될 것이다.
그날들이 나의 인생, 나의 한평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몸이 불편하셔서 두문불출하시는 80대 어르신 댁에 방문해서 두어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르신들이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는 옛이야기다.
배우자를 만나게 된 사연을 말해 달라면 몇십 분 동안 얼굴에 미소를 띠고 이야기를 하신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이야기를 하는 순간은 소년이요 청춘이 되는 것 같다.
자녀들을 키우면서 힘들었던 때와 기뻤던 때를 말해 달라면 애틋한 표정으로 또 몇 십분 동안 이야기를 하신다.
품 안에 있던 자식이었는데 이제는 자신보다 훌쩍 커버렸다며 흐뭇해하신다.
어르신들은 기억의 저장고에서 추억 하나씩 꺼내서 들여다보는 재미로 사시는 것 같다.
그러니까 젊어서는 추억거리를 하나씩 쌓으면서 살고 나이 들어서는 그 쌓은 추억을 하나씩 꺼내 보면서 산다.
추억거리 하나가 하나의 인생이다.
한평생이다.
하루를 한평생처럼 사는 것은 하루에 추억거리 하나씩 만들며 사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