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회 중에 100명 이상의 오케스트라단이 연주하는 교향곡(Symphony)이 있다.
음악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도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 5번 ‘운명’, 6번 ‘전원’, 9번 ‘합창’ 등은 학창시절에 시험문제에 단골로 나왔으니까 들어는 봤을 것이다.
최소한 무거운 소리로 ‘빠바바 밤!’하고 연주되는 운명 교향곡은 안 들어본 사람이 없을 것이다.
말 뜻이 어려울 수 있는데 한자어를 풀어보면 여러 악기가 서로 어우러져서 소리를 낸다고 해서 ‘교향곡(交響曲)’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18세기 비엔나 삼총사로 불리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에 의해서 그 틀이 확고해졌고 대중에게도 많이 알려져서 사랑받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리는 하이든은 100여 편이 넘는 교향곡을 작곡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지금도 그러지만 예전에도 대부분의 음악가나 미술가들은 누군가 후원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창작활동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하이든은 헝가리의 귀족 에스테르하지 후작 형제의 지원을 받아 에스테르하지 궁전의 관현악단에서 무려 30년 동안 부악장으로, 악장으로, 지휘자와 작곡자로 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말이 좋아서 궁궐 관현악단이지 실상은 궁궐에 갇혀서 하루에 한두 번씩 귀족들을 위한 음악회를 연주해야 하는 신세였다.
자신들의 생계를 쥐고 있는 후작을 위해서 아름다운 곡을 써서 바치기도 했고 후작의 여행길에 함께 동행하기도 했다.
세상과 단절된 채 음악만 만드는 기계처럼 살아갔던 것이다.
아무리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라고 해도 그렇지 가족도 챙길 수 없었으니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던 중 1772년 여름에는 휴가기간이 다 지나가는데도 휴가 한 번 가지 못하고 매일같이 연주를 하였다.
그때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하이든은 ‘고별’이라는 교향곡을 작곡하여 연주회에 오렸다.
그런데 이 곡의 끝부분에 다다르자 연주자들이 한 명씩 자신의 악기를 들고 자연스럽게 무대에서 퇴장하는 것이었다.
악보를 볼 수 있도록 비춰주었던 촛불도 하나씩 끄고서 말이다.
요즘은 심심치 않게 연주회 중에 이런 퍼포먼스를 볼 수 있는데 당시로서는 너무나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연주자들이 주인이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자리를 떠나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휘자인 하이든은 마치 연주회의 한 순서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관현악단들을 한 명씩 퇴장시켰다.
그렇게 연주회를 생전 처음 보는 형식으로 잘 마무리하였다.
연주회가 끝난 후 후작을 만나러 가는 하이든의 발걸음은 굉장히 무거웠을 것이다.
후작의 노여움을 받아 관현악단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이든은 자신만을 바라보는 관현악단의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들도 사람이다.
아무리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지만 계속되는 연주회 때문에 피곤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고, 가족을 만나고 싶기도 하고, 연인과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하이든은 그들을 위해서 ‘고별교향곡’을 만들었고 연주하였던 것이다.
이심(以心)이면 전심(傳心)이라던가! 하이든을 만난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자신의 배려가 부족했던 것을 인정하고 연주자들에게 휴가를 보내주었다.
하이든은 연주회도 훌륭히 마쳤고, 후작의 체면도 세워주었고, 단원들의 소원도 이루게 해 주었다.
자신의 재능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끼친 하이든처럼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