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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눈 시력을 잃어버린 사람의 이야기

by 박은석


노안이 진행 중이다.

나에게는 이런 날이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기어코 오고야 말았다.

내가 노안을 의식하게 된 것은 2년 전쯤이었다.

잘 아는 안경원에 갔다가 호기심에 시력 검사를 했는데 노안 판정을 받았다.

믿기지 않았지만 안경원 사장님이 건네준 돋보기를 껴 보니 세상이 밝게 보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눈에 희뿌연 막이 하나 쳐 있었다.

이제는 깨알 같은 글씨는 잘 보이지 않는다.

전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글을 읽을 때 왜 신문이나 책을 멀찍이 들고 읽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해된다.

그래야 글이 더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그 과정을 밟아가고 있다.

얼마 전에 갑자기 시력을 잃으신 어르신을 찾아뵈었다.

급성 녹내장으로 최근 두세 달 사이에 급격히 시력이 떨어져서 앞이 안 보이게 되셨다.

너무 낙심하셔서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이렇게 사는 게 지옥이라고 하셨다.




내가 만약 그런 일을 겪는다면 나는 어떻게 하루하루를 지낼까?

그 청천벽력 같은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받아들이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겠지만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너무 힘들 것 같다.

그래도 어떻게 하겠는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살아가야 하니까 눈먼 자의 삶의 삶을 하나씩 배우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눈이 멀었다고 해서 삶을 놓아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눈이 멀었다고 해서 살아갈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눈이 멀면 눈이 먼 대로 살아갈 이유가 있을 것이다.

포르투갈의 작가 주제 사라마구가 쓴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시력을 잃어버리는 병이 전염병처럼 도시를 감싼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눈먼 사람들을 수용소에 가둬버린다.

눈먼 자들의 수용소.

그곳은 암흑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죽음의 수용소 같지만 사람들은 그곳에서도 희망을 발견한다.

숨을 쉬는 한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




제목이 하도 시건방져서 냉큼 장바구니에 넣은 책이 있다.

조승리 작가의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이다.

작가 이름이 생소해서 검색해 보았더니 열다섯 살에 시력을 잃은 장애인이란다.

1986년 아시안게임이 열릴 때 태어났다고 했으니까 이제 마흔도 안 되었다.

나보다도 한참 어린 작가이다.

스무 살 갓 넘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시각장애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제한적이다.

그녀가 택한 일은 안마사였다.

살기 위해서 그녀는 안마사가 되었다.

처음 시력을 잃는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 의사는 10년의 기한을 선고했다.

그 이전에 장님이 된다고.

헬렌 켈러가 쓴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에세이를 보면 한 시간 일 분 일 초를 헛되게 보내지 않으려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조승리 작가는 자신이 볼 수 있는 시간에 최대한 많은 책을 보려고 하였다.




눈이 잘 보이는 사람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눈이 멀어버린 그녀에게는 너무나 특별한 일이 된다는 사실을 책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시각장애인의 일상은 어떨까 궁금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시각장애인이나 나나 비슷한 일상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앞이 안 보인다고 해서 인생의 꿈이 안 보이는 것은 아니다.

눈먼 자들에게는 눈뜬 자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눈이 있다.

그 눈으로 그들은 세상을 보고 인생을 보고 꿈을 보고 희망을 본다.

사춘기 소녀가 눈을 잃어가면서 어두운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앞이 안 보이는 깜깜한 터널인 줄 알았다.

하지만 터널 저쪽에 새로운 세상이 빛을 비추고 있었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하나의 문이 열리듯이 조승리 작가에게도 새로운 문이 열렸다.

물론 그 문을 여는 데는 많은 힘이 필요했다.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방법으로 그녀는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었다.

희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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