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1년 열두 달이 있지만 한가위가 들어 있는 음력 8월이 가장 넉넉한 달이었다.
대지를 녹일 듯이 이글거리던 태양이 그 열기를 빼주었기 때문일까?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이었을까?
논밭의 곡식과 과일이 익어가는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일까?
이제는 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가위는 우리에게 넉넉한 마음을 준다.
한가위를 추석(秋夕)이라고도 하는데 저녁이 되도록 추수를 하는 계절을 떠올린다.
배 부르고 등 따시면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다고 했는데 그런 계절이 한가위 어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 계절이 기쁠 수밖에 없었다.
넉넉한 기쁨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어진다.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도록 음양으로 나를 도와준 분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떡을 빚고 과일 두어 개를 보태서 한 바구니 들고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내 어렸을 적 추석은 하루하루 손을 꼽아가며 기다렸던 날이다.
추석에는 기름진 음식을 풍족하게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 골목길을 걷다 보면 어느 집에서 전을 부치는 냄새가 울타리를 넘곤 했다.
지글지글 기름 튀는 소리가 들릴 듯 보일 듯했다.
그 냄새만으로도 입가에 군침이 돌았다.
침을 꼴깍 삼키며 이발소로 들어갔다.
들판의 풍성한 곡식 못지않게 머리 깎으려는 사람도 풍년이었다.
솥에다 솔잎을 깔아 그 위에 떡을 얹혔다.
널찍한 만두피에 삶은 나물과 고기를 넣어서 모양지게 꿰맸다.
꼬치에 고기를 꽂아서 산적을 만들었고 쌀밥을 짓고 고깃국을 끓였다.
친척집이든, 친구집이든 어느 집에 가더라도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1년 열두 번의 보름달 중에서 한가위의 보름달이 가장 커 보인 이유는 풍성한 계절에 넉넉한 마음으로 맞이하는 보름달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가위는 그런 날이었다.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로 올라온 이후에 맞이한 추석은 낯선 추석이었다.
골목길에 들어서도 전 부치는 냄새가 담을 넘어오지 않았다.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밥 한 그릇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음식을 만들어 옆집에 건네주는 일도 없었다.
이웃에 방해하지 말고 내 집에서 조용히 지내야 하는 추석이 되고 말았다.
일상에 치우쳐 바쁘게 살아가느라 고향집도, 마을 골목길의 풍경도 잊은 지 오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추석이 다가오면 나의 살던 고향이 생각나고 부모 형제와 함께 살았단 고향집이 떠오른다.
다른 날은 몰라도 이날만큼은 고향에 다녀오리라, 부모님을 뵙고 오리라 마음먹는다.
고향에 가고 부모님을 찾아뵙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나의 뿌리를 찾아가는 일이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나의 근본을 찾는 일이다.
이 일은 누가 시켜서 되는 일이 아니다.
본능이다.
추석은 우리에게 그 본능을 깨워준다.
고향 가는 열차표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비행기표는 벌써 몇 달 전에 동이 났다.
평상시에는 여유 있었던 고속버스도 추석 연휴에는 만석이다.
고속도로에는 온갖 차량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3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10시간이 걸려서 간다는 말도 당연하게 여겨진다.
고생고생하면서 가는 길이 고향 가는 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고향 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밝기만 하다.
몸은 고단하겠지만 이제 곧 고향집에 도착한다는 설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가 계신 우리 집에 간다는 흥분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누구의 아빠로 엄마로 살고 있지만 아버지 어머니 집에 가면 그곳에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아들과 딸이라는 것은 비빌 언덕이 있다는 말이다.
고향이 비빌 언덕이고 고향집이 비빌 언덕이다.
아버지 어머니는 영원히 비빌 언덕이다.
추석을 맞아 벌써 마음은 고향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