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저녁 8시 혹은 9시가 되면 각 방송사마다 저녁 뉴스를 송출한다.
한 시간 가까이 다양한 사건과 사고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참 기괴한 일도 많고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도 많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다 있을까 하는 분노 유발자들도 많다.
그런가 하면 가끔은 세상에 저런 천사 같은 사람이 있을까 하는 선행자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악한 사람도 어렸을 때는 악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언제부터 악해진 걸까?
선한 사람도 어렸을 때는 개구쟁이였고 말괄량이였을 텐데 언제부터 착해진 걸까?
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사람은 본래 선하게 태어났는데 이 악한 세상에 살다 보니 물이 들어서 악해진다는 주장이 있다.
반면에 사람은 원래 악하게 태어났는데 세상의 규율과 가르침을 따르다 보니까 점점 착해지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두 주장은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계속 논쟁거리가 될 것이다.
공자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했던 맹자(孟子)는 사람은 원래부터 착하다고 하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창했다.
반면에 공자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했던 또 다른 사람, 순자(荀子)는 사람은 원래부터 악하다고 하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창했다.
이런 상반된 주장을 펼쳤지만 맹자나 순자 모두의 희망사항이 있었다.
그것은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맹자는 사람의 본성이 원래 선하니까 그 선한 것들을 잘 지키고 발전시키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순자는 맹자와는 다른 각도에서 사람을 보았다.
사람의 본성은 원래 악하니까 그런 상태의 사람을 잘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 가르치고 잘 배워서 이 본래 사람에게 있었던 악한 것들을 씻어내고 벗겨내면 그 사람도 좋아지고 그가 사는 세상도 좋아질 것이라고 보았다.
맹자도 순자도 모두 세상이 더 좋아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는 맹자보다 순자의 주장에 조금 더 편을 든다.
내가 믿는 기독교 신앙도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죄인이라고 가르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이후 그들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원죄(原罪)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는다.
사람이 악하게 태어나기 때문에 사람이 사는 세상도 더 악해질 것이 뻔하다.
그런데 100년 전, 1000년 전보다 지금 세상이 더 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
어쩌면 100년 전, 1000년 전보다 지금 세상이 더 나은 측면도 있다.
어째서 점점 더 악해지지 않는 것일까?
어째서 예전보다 더 좋아지는 측면도 있는 것일까?
그건 이 사회가 법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사람에게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법이 없으면 맘대로 살아갈 텐데 법이 있으니까 그것을 지키려고 한다.
법을 안 지키면 혼나니까 그게 무서워서라도 법을 지키려고 한다.
법을 몰라서 실수해서도 안 되니까 법을 알려고 배우려고 한다.
공부하려고 한다.
언제까지 배우고 공부해야 할까?
평생이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에 배우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된다.
순자가 말했다.
“푸른 물감은 쪽이라는 풀에서 얻지만 쪽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로 만들어지지만 물보다 더 차갑다.
반듯한 나무도 힘을 가해 굽히면 둥그런 수레바퀴를 만들 수 있다.
쇠붙이를 숫돌에 갈면 날카롭게 되듯이 사람도 널리 배우고 매일 자신을 반성하면 지혜가 밝아지고 행동에 허물이 없게 될 것이다.
높은 산에 오르지 않으면 하늘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없고, 깊은 계곡에 가 보지 않으면 땅이 두터운 것을 알 수 없으며, 옛 선왕이 남긴 말을 배우지 않으면 학문이 위대하다는 것을 알 수 없다.
아이들이 태어날 때는 모두 똑같은 소리를 내지만 성장하면 사는 곳에 따라 풍속이 서로 달라진다.
교육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 <순자> 권학(勸學)편 중에서-
배워야 한다.
책에서 배우고 사람에게서 배우고 세상살이에서 배워야 한다.
평생 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