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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배우는 교육이 중요하다

by 박은석


존 러벅은 <아주 오래된 지혜>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의 말을 인용했다.


“모든 사람은 두 가지 종류의 교육을 받는다.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배우는 교육이고 또 하나는 스스로 배우는 교육인데 후자가 더 중요하다.”


교육의 중요성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였던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다. 힘을 얻으려면 배워야 한다. 교육을 받아야 한다. 존 러벅은 당시 영국 사회를 관찰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깊이 통감했다. 아이들을 막살게 두었던 때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서 교육을 받게 했던 때를 비교해 보았다. 결과는 엄청났다. 길거리에서 싸움을 거는 아이들이 줄었다. 사고를 쳐서 재판을 받는 아이들이 줄었다. 교도소에 수감되는 아이들도 줄었다. 사회가 훨씬 안전해졌다. 존 러벅을 그 현상을 교육의 힘이라 보았다.




사회가 평안하려면 그 사회를 유지하는 여러 규칙들을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교육이 필요한 이유다. 그렇지만 교육이 사회를 유지하는 기능으로서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교육은 자기 자신을 알아가기 위해서도 절실히 필요하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붓는 교육 시간은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교육 시간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시간이 인생이다. 사춘기 때만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이 질문은 평생 간다. 소크라테스는 델포이신전에서 ‘너 자신을 알라’라는 글을 보았다. 그 말을 신의 계시로 받아들였다. 델포이신전에서 나온 그는 아테네 시내를 걸어 다니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물어보았다. 사람들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누구인지도 모를뿐더러 그들도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알려고 하지 않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백지장 같은 자신의 마음에 누군가 지식과 지혜를 적어주기를 바랐다. 다른 사람에게서 배울 게 없나 알아보려고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했고 지식과 지혜를 끌어내는 산파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지 못했다. 어쩌면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그의 배움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소크라테스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찬란하게 공부하다가 가는 삶으로 묘사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독배도 두려워하지 않고 달게 받지 않았을까 싶다. 배움에는 힘이 있다. 몰라서 두려운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도 말했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만약 나 자신을 안다면, 세상을 안다면, 삶과 죽음을 안다면 두려울 게 무엇이 있겠는가?




소크라테스보다 한 세대 전에 중국에서는 공자가 살았다. 공자의 삶도 평생 배우는 삶이었다. 그의 제자들의 공자의 가르침을 엮어서 <논어>라는 책을 만들었다. 그 첫 장 첫 줄에 뭐라고 쓸까 고민했을 것이다. 공자의 삶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무엇일까? 제자들은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공부이다. 그래서 논어의 첫 편은 <학이>편이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아(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또 익히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중학교 한문시간에 줄줄 외웠던 문장이다. 그로부터 몇십 년을 살아 보니 배움의 중요성을 깊이 알겠다. 배워야 한다. 배워야 된다. 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이 있었기에 배우기가 쉬웠다. 어렸을 때는 어른들이 계셨기에 배우기가 쉬웠다. 하지만 지금은 나를 가르쳐줄 사람이 별로 없다. 스스로 배워야 한다. 에드워드 기번의 말이 와닿는다. 다른 사람에게 배우는 것보다 스스로 배우는 교육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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