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빈다> - 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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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오곡백과 무르익는 결실의 계절이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이 찌는 계절이다
온 천지에 벼 이삭이 굴러다니는 천지삐까리의 계절이다
먹을 게 차고 넘치는 허벌나게 많은 계절이다
길바닥에 치이는 게 단풍잎이요 은행잎이다
봄여름의 찬란한 햇빛을 온 몸으로 받아내고
춥고 메마른 겨우살이를 위해 장렬히 자신을 떨구어내는
이파리의 처절한 헌신에 경탄을 자아내는 계절이다
아침에는 성애에 살얼음에 겨울 날씨 흉내내다가
한낮에는 두터운 옷이 무안케 되는 훈훈한 바람이 불고
밤이 되면 옷깃을 싸매도록 찬바람을 쏘아대는
변덕 심한 계절이다
정신줄 잠깐 놓는 사이 고뿔이 찾아오는 계절이다
괜히 몸 자랑하다가 몸져 눕는 계절이다
그래서인가 그래서였을까 그러지 말기를 바라서일까
시인은 가을을 경고한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폴 발레리의 시가 생각나는 밤이다
<해변의 묘지>였지
해안가에서 파도가 몰려와 떼죽음 당하는 모습을 보았지
떼로 몰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의 죽음
그곳을 '해변의 묘지'라고 불러도 무관하리라
그런데, 그런데...
하얗게 죽은 줄 알았던 파도가 다시 푸르른 바다속으로 빨려간다
그리고는 다시 거대한 파도가 되어 밀려온다
바람이 분다 파도가 일렁인다
죽은 줄 알았는데 다시 살아난다
죽고 싶은 마음이 싹 가라앉았나 보다
그래서 나즈막한 소리로 고백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오늘은 이 두 마디로 마무리 지어야겠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