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기일(忌日)에 부쳐

by 박은석


아버지의 기일(忌日)이다.

벌써 33년의 시간이 흘렀다.

아버지는 젊으셨다.

한국 나이로 53세.

6남매의 자식 중 첫째, 둘째딸은 시집을 갔고 셋째딸은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넷째이자 장남인 나는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었고, 다섯째인 남동생은 해병대 신병훈련을 마치고 첫 휴가를 받아 나왔던 때였다.

아버지에게 거수경례를 붙이고 싶었겠지만 아버지는 뇌출혈로 인한 반신마비로 병상에 누워계셨다.

아무런 말씀도 하실 수 없으셨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여동생은 집에서 동동 발만 구르고 있었다.

어떻게든 아버지를 살려보려 안간힘을 썼던 어머니의 나이는 그때 갓 쉰하나.

어미보다 먼저 가는 불효막심한 자식이 어디 있느냐며 할머니는 통곡을 했다.

가슴이 콱 막혔다.

아버지 없는 하늘 아래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이었다.

아버지의 장례날은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교회 집사님들이 찾아와서 산 사람은 살아야 된다며 위로해주셨다.

그때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는 모든 것을 아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이를 악물고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꾸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잠시 학교를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새벽에는 신문배달을 하고, 낮에는 노가다를 뛰고, 저녁에는 과외를 하면 수입이 괜찮을 것 같았다.

아직 몸뚱아리가 튼튼하고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이라는 이점이 있었다.

교회에 노가다 십장 집사님께 부탁을 해서 나를 써달라고 했다.

벽돌을 나르고 시멘트를 나르는 것쯤은 할만 했다.

스물두 살 대학생으로서는 괜찮은 벌이였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면 벌어들인 게 어디로 빠져나가는지 하나도 남지 않았다.

틈이 날 때는 도서관에도 갔고 일거리가 없을 때는 군입대를 앞둔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렇게 청춘의 시간이 지나갔다.




왜 나에게 이런 가혹한 일을 주셨냐고 하나님께 따져 묻기도 했었다.

길 한복판에 서 있으면 사람들은 즐겁게 웃으며 지나가는데 나는 우울했다.

웃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힘든데 저 사람들은 뭐가 좋아서 저러나 얄미운 마음이 들었다.

남동생은 군대에서 매일 아침 점호 때마다 부모님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며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 수 있냐고 언성을 높였다.

여동생은 공부는 해서 뭐하냐며 학교를 때려치우겠다고 했다.

나는 어정쩡한 모습으로 식구들 틈에 섞여 있었다.

몇 달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머니의 머리에 흰머리가 수북했다.

흰머리가 별로 없었던 분이셨는데 1년 사이에 어머니가 할머니로 변신했다.

내 인생만 왜 이리 힘드냐고 투정했는데 모두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복학을 해야 하는지 군 입대를 해야 하는지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스물두 살의 시간이 지나갔다.




33년의 시간을 어떻게 지내왔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아버지는 늘 당신이 우리 집안의 기둥이라고 하셨다.

기둥이 무너지면 집이 무너진다고 하셨다.

기둥이 무너졌을 때는 나는 집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찌어찌 살다 보니까 여기까지 살게 되었다.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A형 독감인지 B형 독감인지 목소리에 그간의 고생이 잔뜩 묻어 있었다.

꿈에 아버지를 만나시냐고 했더니 아버지도 만나고 아들도 만났다고 하신다.

아버지 기일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꿈속에서 아버지를 자주 만나신다.

그 만남이 상상이 안 된다.

아버지는 쉰셋인데 어머니는 팔순을 훌쩍 넘기셨다.

아버지는 나보다 어린데 어머니는 할머니가 되셨다.

두 분이 꿈에서 무슨 말씀을 하실까?

“폭삭 속았수다(제주 방언으로 무척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뜻).”

한마디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말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참 고생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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