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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12월은...

by 박은석


성탄절이 다가오니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의 신앙을 되돌아보게 된다.

아기 예수님을 맞이했던 동방박사들의 마음도 그랬을까?

일설에 의하면 그들은 페르시아 쪽에 살았던 천문학자들이었다고 한다.

말이 좋아 천문학자지 당시의 사회에서는 점성술자로 불렸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아기 예수님을 만나러 신비한 별을 좇아 머나먼 길을 떠났다.

확실히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을 할 수도 없었다.

제발 저 별의 주인이 누구인지 만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심정으로 먼 여행을 떠났을 것이다.

매일 자신들의 몸과 마음을 다잡으면서 말이다.

그 마음과 행동들이 모아져 거룩한 종교성을 띠게 되었을 것이다.

부족하나마 나도 12월 25일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나의 마음과 행동들을 점검한다.

양심에 거리끼는 일은 최대한 줄이고 경건한 시간을 가져보려고 마음먹는다.

그 시도 중 하나가 헨델의 메시아 전곡 듣기이다.




언제부터인가 12월이 되면 메시아 전곡 듣기에 도전한다.

2시간 30분가량 이어진다.

때로는 집중해서 영상에 몰입하지만 때로는 배경음악처럼 틀어놓기만 하고 딴짓을 한다.

어떤 때는 하루에 한 번 듣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하루에 두 번 듣기도 한다.

하도 많이 들어서 그런지 총 53곡의 곡들이 이제는 꽤 익숙해졌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2번째로 나오는 테너 서창 <내 백성을 위로하라>이다.

물론 나도 44번째 곡인 <할렐루야>를 무척 좋아했다.

고등학생 때 합창반에서 열심히 불렀었다.

<할렐루야>가 연주되면 저절로 나도 베이스 음을 노래한다.

<할렐루야> 다음에 나오는 45번째 곡 <내 주는 살아계시니>도 좋아한다.

그런데 2번째 곡에 비할 바 아니다.

내가 왜 2번째 곡을 좋아하냐면 그 가사가 너무 좋기 때문이다.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멀리서부터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잘 부르는 테너 가수의 영상을 보면 “위로하라(Comforty)”라는 부분을 노래할 때 그 얼굴표정이나 목소리의 떨림이 애잔하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저절로 드러나는 측은해하는 얼굴표정이다.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면서 저런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계신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 멀리서, 저 하늘 끝에서 나를 향해서 “내가 너를 위로한다” 외치시는 것 같다.

아니면 전령을 보내셨든지.

소식을 전하는 전령이 멀리서 외친다.

“위로하라!” 그런데 거리가 멀다 보니 그 소리가 작다.

그래서 2번째 곡에서 “위로해!”라고 부르는 목소리는 작게 시작한다.

멀리서 들리는 소리니까.

하지만 전령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면서 외치는 소리도 커진다.

“위로하라, 위로하라, 위로하라”

사람들은 마음에 확신이 생기면 목소리가 커진다.

전령의 말이 곧 실현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에 위로하라는 말이 점점 크게 들리는 것이다.




내가 메시아 53곡 전곡 중에서 2번째 곡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나를 위로하신다는 말이 내 귀에 들리고 내 마음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1년 중 11개월은 정말 앞만 보며 줄기차게 달리고 치열하게 산다.

그러다가 12월이 되면 솔직히 몸과 마음이 지친다.

만신창이가 된 심정에서 다시 새로운 한 해를 내다본다.

올해는 어떻게 견뎌왔는데 내년에는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이 든다.

날씨도 추워지는데 마음은 더 추워지는 계절이 바로 이 계절이다.

그런데 누군가 나의 마음을 알고 나의 처지를 알고 나를 위로해준다고 한다.

그 누군가가 바로 하나님이다.

그분이 나를 위로하겠다고 하는데, 내 백성을 위로하겠다고 하는데, 누가 방해를 하고 막을 수 있겠는가?

게임 끝났다.

하나님이 위로하신다니까 게임은 끝났다.

나에게 12월은 헨델의 메시아 전곡을 듣는 계절이다.

그리고 위로의 계절이다.

게임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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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필하모닉의 메시아 전곡 연주 영상 중 2번째 곡을 부르는 장면

https://youtu.be/bR0cEOTpYSk?list=RDbR0cEOTpY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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