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적 생각으로 보는 성경이야기
창세기 12장 14절에서 20절은 아브람이 애굽에서 겪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보여주고 있다. 애굽 사람들이 사래의 아리따움을 보았다. 애굽왕 바로의 신하들도 사래의 아리따움을 보았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애굽왕 바로 앞에서 칭찬했다. “폐하, 세상에 너무나도 아리따운 여인이 한 명 있사옵나이다.” 이런 식이다. 그 말을 들은 애굽왕 바로가 사래를 궁궐로 불렀다. 물론 그 이전에 신하를 보내서 아브람과 협상을 했을 것이다. “폐하께서 너의 누이를 좀 보자고 하신다!” 아브람은 애굽에 갓 들어온 나그네였다. 집에서 기르던 사병이 있다고 하지만 상대는 애굽의 왕이다. 아브람이 꺼낼 수 있는 카드는 없었다. 애굽왕 바로가 자신을 내쫓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사래를 누이라고 소개한 것이 천만다행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당장에 두 사람의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목숨을 건지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창세기 12장 16절을 보면 바로가 사래의 몸값으로 아브람에게 굉장한 사례를 한 것 같다. 지금도 어느 민족 중에는 결혼지참금이란 게 있다. 신부를 데려오는 대가로 신랑이 장인 장모에게 사례를 한다. 아니면 몇 년 동안 처가에 살면서 처가의 일을 도와준다. 장인 장모의 딸을 데려가는 대신 제가 몇 년 동안 처가에 노동력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애굽왕 바로는 사래의 몸값을 일시불로 지불했다. 양도 주었고 소도 주었고 노비도 주었고 나귀와 낙타도 주었다. 아브람이 섭섭하지 않도록 대우해 주었다. 굉장한 일이다.
“(창 12:16)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당시 사래의 나이는 65세 혹은 그 이상이었다. 아무리 오래 사는 시대였다고 하더라도 65세는 적지 않은 나이다. 아브람이 자기 여동생이라고 소개했는데 애굽의 신하들과 바로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면 사래가 65세가 되도록 결혼을 하지 못한 것 또한 큰 문제였다. 그럼에도 바로가 사래를 아내로 맞았다. 바로에게 묻고 싶다. “뭐가 부족해서 그랬냐?”고. 아마 바로에게도 여러 명의 여인이 있었을 거다. 참고로 조선시대에는 왕의 여인으로 비(妃), 빈(嬪), 귀인(貴人), 소의(昭儀), 숙의(淑儀), 소용(昭容), 숙용(淑容), 소원(昭媛), 숙원(淑媛) 등이 있었다. 조선보다 훨씬 오래 전이었고 훨씬 큰 나라였던 애굽왕 바로는 더했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사래가 왕의 부인으로 낙점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날 밤에 곧바로 왕의 침실로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왕이 점찍은 여인은 일단 목욕재계하고 마사지도 받고 애굽 왕실의 예절도 배운 다음에 날짜를 정해서 왕의 침실에 들어갔을 것이다. 창세기 12장 17절은 그 단서를 제공해 준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다. 어떤 재앙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애굽 왕실에 큰 문제가 생겼다. 그 문제가 아브람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사래를 빼앗긴 아브람은 아브람대로 고민이 많았을 것이고 애굽 궁궐에 갇힌 사래는 사래대로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그들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인간이 해결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이 움직이신다.
“(창세기 12: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결국 하나님께서 개입하셨다. 애굽왕 바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닥치는 일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애굽 왕실에 내려진 재앙은 아브람이 가지고 온 것이기 때문에 이 재앙을 없애려면 아브람을 내쫓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브람을 불러 추궁했다. “네가 왜 나에게 이런 일을 행했느냐? 너의 말 때문에 내가 너의 아내를 데려다가 나의 부인으로 삼을 뻔했다. 지금 당장 네 부인을 데리고 여기서 떠나거라!” 우리는 이 부분에서 애굽왕 바로가 대단히 약해진 것 같은 착각을 한다. 하지만 4천 년 전으로 우리가 들어가 본다고 생각해 보자. 진짜 쫄았던 사람은 아브람일 것이다. 애굽왕 바로가 부른다는 말을 듣고 애굽 궁궐에 들어설 때 아브람은 “이제 나는 이대로 죽는 것인가?”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애굽왕 바로가 아브람을 죽이지 않고 추방령을 내렸다.
아브람이 다시 한 번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다. 왕을 속인 죄는 죽어 마땅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애굽왕 바로는 아브람을 살려주었다. 그리고 그를 애굽에서 떠나게 했다. 사래와의 결혼은 무산되었다. 그렇다면 아브람에 주었던 양과 소와 노비와 나귀와 낙타는 돌려받아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바로는 자기가 한 번 준 것을 다시 빼앗지 않았다. 왕의 체면도 작용했을 것이고, 그동안 맘 고생했을 사래에 대한 위로금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덕분에 아브람은 부자가 되었다. 분명히 아브람이 사고치고, 아브람이 엉뚱한 일을 했고, 아브람이 믿음 없는 행동을 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람에 복을 주셨다. 부자가 되게 해 주셨다.
하나님을 믿는 즐거움이 있다면 이런 것이다. 내가 잘할 때도 복을 받지만 내가 못 할 때, 실수하고 실패하고 넘어지고 믿음 없는 행동을 하더라도 하나님은 나에게 복 주신다는 것 말이다. 결국 아브람이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은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택하셔서 그에게 엄청난 복을 주시면서 그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훈련시키신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Soli Deo Gloria)’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괜찮은 사람이어서 복 받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는 개념이다. 오늘 나 자신이 조금 부족해 보이더라도 주눅 들지 말자. 하나님은 그런 것에 상관없이 나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