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적 생각으로 보는 성경이야기
기근을 만나 잠시 애굽에 내려갔었던 아브람이 다시 가나안땅으로 돌아왔다. 전에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던 벧엘과 아이 사이의 땅으로 왔다. 다행스럽게도 애굽에서 손해를 보지 않았다. 기적 같은 일이다. 먹고 마시는 것을 비롯해서 상당량의 재산과 사람을 잃을 수도 있었는데 아브람은 잃기보다 오히려 더 얻었다. 창세기 13장 2절에 보면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했다. 가축은 아브람에게 이전부터 꽤 있었다. 하지만 은과 금이 풍부했다는 것은 애굽에서 재산이 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어떻게 애굽에서 재산이 늘었을까? 그것은 아내 사래를 애굽의 왕 바로에게 빼앗겼기 때문이다. 바로가 아브람에게 사래의 몸값을 지불했고 또 아브람이 애굽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나중에 아브람과 사래가 부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바로는 아브람에게 준 사래의 몸값을 돌려받지 않았다. 창세기 12장 19절과 20절을 보면 알 수 있다.
“(창세기 12:19)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20)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아브람은 애굽왕 바로에게 거짓말을 했다. 왕에게 거짓말을 했으니 죽어 마땅한 죄이다. 그런데 아브람은 죽지 않았다. 목숨을 부지했을 뿐만 아니라 아내 사래를 돌려받았고 재산도 더 늘릴 수 있었다. 죄를 지었으면 그에 맞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때도 있다. 오히려 죄를 지었는데, 잘못을 했는데 더 좋은 대접을 받을 때도 있다. 자식이 속을 썩였다고 생각해 보자. 이놈의 자식을 혼내줄 테다 작심을 하지만 막상 자식의 얼굴을 보면 안쓰럽고 불쌍해 보이고 또 한편에서는 우스워 보일 때도 있다. 그런 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뭐 먹고 싶니?” 물어본다. 평상시에는 비싸서 엄두도 못 냈던 소고기를 먹이기도 한다. 그 녀석은 사고 치고 고기도 얻어먹는다. 횡재한 거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일일이 해명할 수가 없다. 대답은 간결하다. 자식이니까. 사랑하니까. 기독교에서는 그렇게 받은 사랑을 은혜라고 한다. 아브람이 나그네로 애굽에 갔다가 부자가 되어 돌아온 것은 은혜였다.
아브람만 부자가 된 것이 아니다. 조카 롯도 부자가 되었다. 만약 아브람은 부자가 되었는데 조카 롯은 탈탈 털렸다면 굉장히 애매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둘 다 부자가 되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이런 거 아닐까? 나도 잘 되고 너도 잘 되는 거.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 복이란 게 뭘까? 예수 믿어서 부자가 되는 것일까? 잘살게 되는 것일까? 나만 부자가 되고 나만 잘살게 된다고 좋은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만 잘되는 것은 결코 좋은 게 아니다. 그건 차별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잘된다는 것은 나도 좋고 남도 좋은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복을 받고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는 말을 너무 쉽게 내뱉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나 혼자만 사는 게 아니라 여럿이 함께 사는 세상이다. 기독교인만 사는 세상이 아니라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사는 세상이다. 내가 잘되려면 남도 잘되어야 한다. 아브람과 롯처럼 서로가 잘되어야 한다.
아브람도 부자가 되고 조카인 롯도 부자가 되었으면 인생 성공한 것 아닐까? 그렇지는 않다. 부자가 되는 게 인생의 목표는 아니다. 요즘 파이어족이 되는 게 꿈이라는 이들이 있다. 10억을 모으고 20억을 모으면 인생의 목표를 이루는 것인가? 아니 100억을 모으고 200억을 모으면 인생의 목표를 달성한 것인가? 그건 아니다. 인생의 목표는 수치로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영국 철학자 칼 포퍼가 쓴 유명한 책이 있다. <삶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지만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 누구나 삶의 문제가 있고 그 문제를 해결해 가면서 인생을 산다는 것이다.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면 그다음에 또 하나의 문제가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아브람과 조카 롯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얼마나 부자가 되었는지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창세기 13:6)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소유가 너무 많다 보니까 아브람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싸우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서로 자기가 돌보는 가축에게 물과 풀을 더 많이 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사이좋게 지내던 형제가 어른이 되어가면서 서로 경쟁하고 결혼한 후에는 아예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띠기도 한다. 왜 그럴까? 좀 더 많이 가지려 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약할 때, 없을 때는 욕심도 적다. 그런데 컸을 때, 강해질 때, 많이 있을 때는 욕심도 많아진다. 이 상황에서 서로 다투지 않으려면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서로 규칙을 정하고 일정한 거리를 둔다. 그 사이를 지켜주는 것이다. 사이좋게 지낸다는 말은 거리를 잘 지키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람과 조카 롯이 서로 거리를 두기로 했다. 서로 떨어지기로 했다. 고향을 떠날 때 함께 했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지냈다. 서로 의지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이제는 서로 떠나야 할 사이가 되었다. 넉넉해졌기 때문이다. 어떤 삶이 더 낫다고 할 수 없다. 가난하지만 모여 사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부자가 되어서 서로 떨어져 사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런 삶에도 어려움과 문제는 있고 저런 삶에도 어려움과 문제는 있다. 삶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