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젊었던 우리 청춘의 때가 떠오른다

by 박은석


해마다 3월이 오면 내 기억의 상자가 하나 열린다.

노란 개나리가 화들짝 피어날 때였다.

노란 햇병아리들이 몰려다니며 삐약삐약거릴 때였다.

노란 티셔츠를 입은 새내기들이 지하철 휘경역을 빠져나와 외대 앞으로 가쁜 발걸음을 돌렸다.

서울 생활 한 달도 안 되었던 나에게는 보이는 모든 게 놀랍고 신기했다.

집도 많고 사람도 많았다.

만원 버스에 사람이 그렇게나 많이 구겨 넣어지는 것도 놀라웠고 회수권 대신 토큰을 내고 버스를 타는 것도 신기했다.

지하철을 탈 때면 갈아타는 역에서 잘 내려야 했는데 자칫 잘못하면 엉뚱한 노선을 타고 목적지와는 점점 멀어지는 길로 가기도 했다.

청량리를 지나 회기역에서 경희대 학생들이 내리면 그다음엔 우리 차례였다.

“이번 정차할 역은 휘경, 휘경역입니다.”라는 안내 방송이 그렇게나 반가울 수 없었다.

비록 경복궁역이나 종로3가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작고 초라한 역이었지만.




지하철역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길 좌우로 양장점도 있었고 커피숍도 있었다.

아직 카페라는 이름은 생소했고 다방보다는 세련된 상호가 커피숍이었다.

그중에는 아내와 데이트할 때 자주 들렀던 ‘오두막’이라는 커피숍도 있었다.

큰길 옆으로 살짝만 골목으로 들어가면 밥집, 술집이 줄지어 나타났다.

자취생, 하숙생들에게 밥을 팔았던 집들은 이른 아침부터 문을 열었다.

1교시는 아침 9시에 시작했다.

얹혀사는 누나 집에서 학교까지 가려면 자하문에서 버스를 타고 경복궁역에서 3호선 전철을 탄 후 종로3가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야 했다.

넉넉잡아 1시간 걸렸다.

수원이나 인천에서 오는 친구들은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 걸렸다.

남학생들이야 잠에서 깬 후 대충 얼굴만 씻고 머리가 감고 나온다고 하지만 여학생들은 꾸미느라 시간도 걸렸을 테니까 고등학교 3학년 때보다 더 부지런해야만 했다.




학교 앞 자취방은 한 달에 10만원에서 15만원 정도 했다.

하숙은 한 달에 30만원 정도.

어느 신문에선가 본 기억이 있는데 당시 대학생들의 한 달 용돈이 평균 10만원에서 15만원 정도 했었다.

평균이니까 그보다 많았던 이들도 있겠고 그보다 적었던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지하철 기본요금이 250원이었고, 자판기 커피가 100원이었다.

학생식당의 가격이 700원이었는데 1000원으로 인상한다고 하니까 학생들이 데모를 했다.

내 친구 중 한 명도 그 데모에 동참했는데 내가 보는 앞에서 식판을 집어던졌다.

굉장히 멋있었다.

친구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 같은 강렬한 카리스마를 느꼈다.

지금은 그 친구가 어느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사진을 보면 굉장히 인자한 눈빛이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친구를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사람이 이렇게나 바뀌기도 하는구나.

세월이 사람을 그렇게 바꿔 놓은 것 같다.




강원도에서 왔다는 준남이, 충청도에서 왔다는 현오, 전라도에서 왔다는 일섭이, 바닷가에서 왔다는 주현이, 부산 수정구에서 왔다는 수정이, 그리고 섬 사람인 상덕이와 더 큰 섬 제주도에서 온 나.

그 외에도 우리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교사 임용고시가 힘들다고 했지만 그래도 대부분 학교 선생이 되었다.

선생 대신 행정직을 택한 친구들, 산속에 들어가 도를 닦는 친구, 중소기업에서 존재감을 발휘하는 친구, 어쩌다가 사업가가 된 친구, 목사가 된 촌놈.

아침 시간에 스튜디오에서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는 친구.

그리고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친구.

삼십 년 넘는 시간이 우리의 모습을 이렇게 바꿔 놓았다.

그래도 해마다 봄이 되면 스무 살 그때, 개나리꽃 노란색이 만발했을 때가 떠오른다.

아침 9시 라디오에서 친구의 목소리가 들리면 삐약삐약 햇병아리 몰려드는 노란색이 떠오른다.

젊었던 우리 청춘의 때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