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식구들과 엄청난 내기를 하게 됐다.
아내가 내년에는 책을 좀 더 많이 읽겠다고 했는데 딸이 우스갯소리로 50권을 읽으면 3만 원을 준다고 했단다.
아내가 쪼르륵 달려와서 남편은 뭐 해 줄 거냐고 물었다.
50권 완독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딸이 3만 원 준다고 했는데 아빠가 쩨쩨하게 5만 원, 10만 원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통 크게 나갔다.
일단은 안전장치를 하나 더 걸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100권 읽으면 50만 원 줄게!”
그 말을 하는 순간 저쪽에 있던 딸과 아들이 자기들도 읽겠다고 했다.
아내는 자신이 100권을 못 읽을 것이라는 확신이 드니까 거금 50만 원을 얘기한 것이 아니냐면서 기필코 100권을 읽어서 50만을 받아내겠다고 큰소리쳤다.
애들은 자기들에게는 어떻게 할 거냐며 대답을 재촉했다.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이 더 난리였다.
나는 기왕에 일을 저지른 것 아예 크게 저지르자고 다시 큰소리쳤다.
“엄마든 딸이든 아들이든 100권 읽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50만 원 준다! 아빠 용돈을 차곡차곡 모아서라도 꼭 준다!”하고 선포를 했다.
그런데 10년도 훨씬 전부터 책장을 지키고 있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같은 것을 읽으라고 했다.
흥분한 아들이 민음사 책을 보면서 기필코 읽겠다고 했는데 사실 조금 무리이긴 하다.
그래서 너그러운 아빠가 다시 양보했다.
민음사 책은 20권 이상. 그리고 웹툰은 0.5권으로 쳐 주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아내와 딸이 불공평하다며 웹툰은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아들은 웹툰을 수집하듯이 사들였는데 그것을 읽는 속도가 정말 빠르다.
그래서 결국 웹툰은 제외하기로 했다.
이제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딸은 상대적으로 자기가 책 읽을 시간이 빠듯하니까 제일 불리하다고 한다.
그런데 더 이상의 타협은 없다.
겨울방학 때 읽으면 된다고 했다.
사실 딸은 나보다 책 읽는 속도가 두 배는 빠른 것 같다.
그러니까 마음만 먹으면 100권 완독을 제일 먼저 끝낼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딸이다.
아내는 아마 내년 연말쯤까지 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 식구들이 순박한 것 같지만 은근히 승부욕이 강하기 때문에 아마 세 명 다 목표를 달성할 것 같다.
절대적으로 내가 지는 내기이다.
벌써 딸과 아들은 50만 원을 받으면 그것으로 무엇을 할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기를 하면서도 나는 기분이 좋다.
오래전부터 식구들이 좀 읽었으면 하면서 전시하고 있는 책들이 이제야 주인을 만날 것 같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딸에게 시집 몇 권을 읽어보라고 줬는데 하루 지나고 나서 고스란히 돌아왔다.
자기 취향이 아니라나.
그런데 이제 기회가 온 것이다.
두꺼운 책은 시간이 걸리니까 얇은 책을 먼저 읽을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시집도 고를 테고 중단편 소설들도 들추고 수필집도 잡을 것이다.
처음에는 읽어내느라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정리하기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이 조금씩 문장들이 쌓이고 생각이 다양해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력도 깊어질 것이다.
족집게 과외선생 붙여서 돈 들여가며 틀에 맞춰 달달 외우는 것보다 백 배 천 배 더 나은 방법이다.
이제 우리 식구들의 내기를 종이에 써서 책상에 붙여놓으라고 했다.
‘2021년 독서 100권에 50만 원!’
정말 오랜만에 책장 넘기는 소리가 집을 채울 것 같다.
나는 내년에 손가락만 빨고 다녀야 한다.
쥐꼬리만 한 용돈으로 150만 원을 모으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