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은석 Dec 25. 2020

내 인생에 가장 조용했던 성탄절


크리스마스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온 식구가 예수님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후’하고 촛불을 껐다.

성탄의 밤이 깊어가고 있다.

흰 눈이 펑펑 내리지 않아도,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리지 않아도 성탄의 밤이 지나가고 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은 머리맡에 양말을 올려놓고 일찍 잠을 잤다.

그리고 새벽에 선잠이 깨서는 머리맡을 살펴보고서 탄성을 질렀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게 너무 고마워하며 선물을 품에 안고 다시 잠을 잤다.

그러면 우리 부부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성공했다고 즐거워했다.

아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성탄선물을 다 받은 셈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산타 할아버지가 없다는 것도, 선물이 전달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안다.

그만큼 탄성과 웃음도 줄어들어 조용한 성탄을 맞이하고 있다.




불현듯 스물두 살 때의 성탄절이 생각이 났다.

아버지를 천국으로 보내고 맞이하는 첫 성탄절이었다.

2남 4녀와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8식구의 우리 집안에서 성탄절 분위기에 가장 먼저 젖어드는 사람이 아버지이셨다.

우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한 달 전부터 성탄트리를 장식하고 카세트에 성탄캐럴 테이프를 넣어서 밤새도록 틀어놓으셨다.

아이들보다 더 성탄절에 흥분하셨던 분이 아버지이셨다.

그런데 그 해 1월에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가셨고 한 해 내내 집안에는 우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시집간 누나 셋, 해병대에 들어간 남동생, 고등학교 1학년인 막내 동생, 갑자기 집안의 가장이 된 스물두 살의 나와 쉰한 살의 어머니.

아무도 다른 식구를 돌보아줄 여유가 없었다.

각자 자신의 삶을 견디기에도 버거웠던 지독한 시간들이었다.




휴학을 하고 집에 머물며 아버지의 빈자리를 지키려고 했다.

일단 경제적으로 가정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스물 갓 넘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중고등학생 과외가 전부였다.

그것으로는 집안을 건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동네 아는 형님을 통해서 공사현장에 나가서 벽돌과 시멘트를 날랐다.

일당 4만 원.

하지만 그 일도 매일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뭔가 정기적인 일을 해야 했다.

그래서 새벽에 신문배달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새벽 한두 시간 오토바이를 타고 신문을 배달하면 하루 종일 몸이 피곤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책도 읽고 공부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도통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어느덧 열한 달이 지나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버지 없이 지내는 첫 번째 성탄절이었다.




집안의 우울한 분위기를 바꾸고자 나름 생각을 해서 어머니에게 성탄선물을 드렸다.

무엇인지 기억은 안 난다.

하지만 어머니의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아버지도 없는데 성탄절은 무슨 성탄절이냐?”

그 말을 듣자 너무 속상했다.


남들은 떠들썩하게 웃고 즐기는 성탄절인데 우리 집은 우울한 성탄절이 되고 말았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오토바이를 타고 집에서 떠나기로 했다.

30분 동안 신나게 달리면서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질러댔다.

그리고 바닷가에 도착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내 고향 제주도는 섬이다.

벗어나려고 생난리를 쳐도 고작 30분이면 땅 끝에 다다른다.

더 이상 벗어날 수가 없다.

한참 바닷바람을 맞은 후 내가 있어야 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어머니와 함께 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집에서 하루 종일 지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조용했던 성탄절이었다.

비록 화려한 이벤트나 값비싼 선물이 없더라도,
시끌벅적하게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더라도,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를 지킨다면
그날이 최고의 성탄절이다.

크게 외치지 않아도
작은 소리로 뇌어도
"메리 크리스마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