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서 당연한 일

by 박은석


해마다 연초가 되면 이번 한 해를 어떻게 살까 살짝 고민을 한다.

대개는 자기 신상에 대한 결심을 하면서 반드시 무엇을 해 보리라 다짐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러다가 가끔 좀 큰 계획도 세워본다.

올해는 자격증을 취득한다거나 외국어를 공부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뭔가 획을 그을 수 있는 일들에 도전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잊을만하면 다시 생각이 난다.

이 제목으로 출간된 책들도 여러 권이 있다.

어떻게 산다는 것은 보통 무슨 일을 하며 사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서 보람과 의미를 찾지 못하면 견디기 힘들어한다.

그 일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여기고 자신은 지금 잘못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살고자 하는 삶의 모습이 따로 있다.




이런 노골적이고도 거창한 주제를 대하면 아무리 이기적인 유전자로 똘똘 뭉친 사람일지라도 다른 사람과 사회를 위해서 무엇인가 기여를 하고 싶은 속내를 내비친다.


복권 1등에 당첨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자기가 다 가져가서 숨어버리겠다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부모 형제에게 조금 나눠주고, 사회에도 기부 좀 하고 그리고 그다음의 계획들을 이야기한다.

어차피 당첨될 가능성도 거의 없는데 말로라도 선심을 쓴다.

그런데 복권에 당첨되지 않아도 이웃과 사회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여를 하는 사람들도 참 많다.

언론에서는 ‘얼굴 없는 천사’라며 기사를 올린다.

그런데 말이라도 제대로 해야 한다.

기자들이 그 선한 사람들의 얼굴을 모를 뿐이지 얼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강원도 정선의 산골에서 30년 동안 자연과 벗하며 살던 ‘씨돌’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도롱뇽이 죽는다고 농약을 치지 못하게 하고 사냥꾼들로부터 짐승들을 살리기 위해 짐승들의 발자국을 쓸어버리는 아저씨였다.

용모는 우락부락하지만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당시에 구조인력이 부족하다는 뉴스를 듣자 단숨에 달려가서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좋은 일만 하는 이 씨돌 아저씨를 민주화운동 당시 길거리에서 보았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의문사를 당한 군인의 진상 규명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 청년과도 닮았다고 한다.

억울하게 아들을 잃은 부모들을 대신하여 목소리를 높이다가 경찰들에게 숱하게 얻어맞았던 그 청년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씨돌’ 아저씨도, ‘요한’이란 청년도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져 버렸다.

SBS스페셜 제작팀이 수소문하고 찾아다녔는데 그들과 비슷한 용모의 할아버지가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 뇌출혈로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할아버지의 이름은 ‘김용현’이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아원에서 자랐다고 한다. 조

용하고 순한 소년이 청년이 되면서 불의한 세상을 보게 된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자기 하나의 인생을 바쳐서 세상을 조금이라도 밝게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으로, 씨돌로 평생을 살아왔다.

자신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순전히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대신 희생하는 삶을 살았다.

왜 그렇게 사셨냐는 물음에 김용현 할아버지는 뇌출혈로 불편한 손으로 꾸불꾸불 글을 쓰셨다.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매일 인간으로서 우리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며 말은 거창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과연 인간으로서 해야 할 당연한 일을 하고는 있었는지 나 자신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숨길 수도 없었고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요한, 씨돌, 용현>을 읽으면서 터져 나오는 눈물도 눈물이려니와 나 자신이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숨어버리고만 싶었다.


이제부터는 누가 나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대답 대신에 이 책을 한 권 사주고 싶다.

<요한, 씨돌, 용현>의 책 판매 수익금은 김용현 할아버지의 뇌출혈 치료비로 쓰인다니 나의 부끄러움을 조금이라도 씻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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