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기온이 조금만 내려가면 바로 진눈깨비로 그리고 함박눈으로 갈아입을 분위기였다.
업무 차 운전을 하고 나갔다가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음은 급한데 큰길 사거리에서 신호등이 바뀌었다.
몇 초만 더 빨리 왔었으면 이 신호등을 건널 수 있었는데 아쉬웠다.
마음이 조급할 때는 신호등의 불빛이 바뀌는 시간도 하염없이 오래 걸리는 것처럼 여겨진다.
1분을 넘어서고 2분도 지나고 3분 정도 되어서 초록색 불빛으로 바뀐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 ‘빨리 가자’ 하는데 가속 페달을 밟을 수가 없었다.
신호등이 바뀌는 그 순간에 할머니 한 분이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몇 대의 차량이 경적을 울려댄 것 같은데 할머니는 전혀 듣지 못하시는 듯 지팡이를 디디면서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가셨다.
옆 차선의 차들이 할머니 앞에서 살짝 비켜 지나갔다.
내 차가 가까이 다가갔지만 할머니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으셨다.
‘치매이신가?’ 이러다가 할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하실 수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왜 내 앞에 이런 분이 계신 거야?’ 살짝 짜증이 나려고 했는데 내 몸은 이미 사이드 브레이크를 올리고 차창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내 뒤에서 오던 차들은 급브레이크를 밟고 내 옆으로 천천히 지나갔다.
할머니에게 다가갔지만 역시 시선이 흐렸다.
“할머니! 어디 가세요?” 여쭤보았지만 “저~어기!”라고만 대답하셨다.
온전한 정신은 아니신 것 같았다.
부축해서 횡단보도를 건너기에는 할머니의 걸음이 너무 느렸다.
왕복 8차선의 큰길인데 아직 횡단보도의 중간도 못 간 상태였다.
빨리 일을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업히세요.”했다.
할머니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에이!” 다짜고짜 내가 할머니를 업어버렸다.
할머니는 “어이 어이!”하는 외마디 소리만 지르셨다.
난생처음 보는 할머니를 업고 횡단보도를 뛰어가는 나 자신을 보며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버스 한 대가 신호대기로 서 있었는데 승객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할머니라고 해서 가벼울 줄 알았는데 전혀 그러지 않았다.
사람을 업으면 업힌 사람이 등에 바짝 기대야 하는데 그 할머니도 놀랐는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서 너무나 불편했다.
내 친할머니조차 한 번 업어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낯선 할머니를 업고 횡단보도를 뛸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어쨌든 무사히 횡단보도를 건넜다.
“이제 내리세요.”하고 말씀드렸는데 할머니가 내 어깨에서 손을 풀지 않으셨다.
어쩔 수 없이 허리를 뒤로 젖혀서 할머니를 내려드리려고 했다.
그런데 할머니는 내 등에서 내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두 팔로 내 어깨를 더욱 세게 잡아당기시는 것이었다.
‘혹시 할머니가 나를...!!’ 생각하는 순간 휘청거리며 뒤로 벌러덩 자빠졌다
비오는 날 양복 잘 차려입은 신사가 90세 정도 된 할머니와 함께 뒤로 자빠졌으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버스 승객들이 사진 찍는 거 아닌지 의식되었다.
‘혹시 9시 뉴스에 떡 하니 사진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젊은 신사, 치매 할머니 업고 횡단보도 건너다가 뒤로 자빠지다.’
그런 기사가 나올 것 같은 창피함이 밀려왔다.
그런데 그보다 더 두려운 생각이 있었다.
‘할머니가 넘어지면서 뼈가 부러진 것은 아닐까? 그럼 영락없이 내가 치료비를 내야 하는가?’하는 생각이었다.
나는 급히 할머니를 일으켜 세웠다.
다행히 뼈는 멀쩡한 것 같았다.
“할머니 가세요. 저도 갈게요.”하고 횡단보도 앞에 서 있던 내 차로 가서 부리나케 도망쳤다.
좋은 일 한번 하려다가 큰일 치를 뻔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착한 일 하는 것도 쉽지 않구나!’ 싶었다.
제발 내 앞에 저런 불쌍한 할머니가 안 보였으면 좋겠다고 하면서도 괜히 헛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