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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고? 실력 없다고? 몇 번이나 해봤는데?

-반복된 도전과 실패가 모아져서 실력이 된다-

by 박은석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과 잠깐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들렸는데 그는 대뜸 “아 이 곡은...”하였다.

신기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렇게 클래식 음악을 잘 알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의 대답은 단순했다.

“그냥 듣다보면 알 수 있어요.”

속으로 부아가 치밀어오를 뻔했다.

나는 클래식음악에 대해서는 그 음악이 다 그 음악 같았기 때문이다.


몇 년이 지난 후 서양음악사에 대한 책을 읽다가 기왕이면 책에 소개된 음악을 끈기 있게 들어보기로 했다.

그래도 일단 이름이라도 익숙한 베토벤의 교향곡부터 들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교향곡 한 곡이 끝나면 또 다른 교향곡 식으로 계속 듣다보니까 신기하게도 내 귀가 조금 뚫리는 것 같았다.

<영웅>에서는 전쟁터에서 승전한 군인이 떠오르고 <전원>에서는 봄꽃 위를 살랑살랑 날아다니는 나비를 상상할 수가 있었다.

된다! 된다! 되는 거였다.




드보르작의 <신세계로부터>를 들으면 범선을 타고 유럽을 떠난 사람들이 대서양 한복판에서 죽기 직전까지 내몰렸던 상황을 그려볼 수 있었다.

저 멀리 흐릿한 것이 보이는데 누군가 “육지다!”라고 외쳤을 때의 그 감격을 느껴볼 수 있었다.

그냥 듣고 듣고 또 듣다보니까 그 선율에 내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몇 년 전에는 체코의 국민음악가인 스메타나에 대한 글을 보았다.

그날 곧바로 그의 교향시 <나의 조국>을 들었다.

특히 2번 <블타바>는 그 한 해 동안 300일 넘게 들었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면 곧바로 나의 조국 2번을 틀어놓았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정서가 비슷했다.

이상화는 시를 썼고 스메타나는 곡을 썼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블타바>를 ‘블타바’라고 부르지 못하고 ‘몰다우’라고 불러야만 했던 자기 민족에게

“이 강의 이름은 블타바이다!”라고 절규하는 소리로 나에게 다가왔다.




한 곡 한 곡이 귀에 익기 시작하니까 클래식 음악 듣는 것에도 재미가 붙었다.

클래식 듣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곡의 작곡 배경을 읽고 그다음에는 귀에 익숙할 때까지 반복해서 듣기만 하면 된다.

배경음악으로 틀어놓든지 아니면 집중해서 듣든지 그것은 중요하지가 않다.

여러 번 듣다보면 그 음악이 익숙해진다.


십대 시절에 인기가요에 푹 빠져 있었을 때도 방식은 비슷했다.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다가 새로운 노래가 나오면 카세트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 노래가 끝나면 카세트테이프가 늘어나도록 듣고 또 들었다.

노래가사를 받아 적으려고 카세트의 재생과 멈춤 버튼을 번갈아가면서 누르기를 수도 없이 했다.

그렇게 귀에 익을 때까지 듣고 입에 익숙해질 때까지 중얼거리면서 노래 한 곡을 배웠다.

CD와 MP3가 나와도 배우는 방식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딱 한 번 듣고 배운 노래는 없었다.




노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살아오면서 익힌 모든 지식과 기술들은 다 반복하면서 배웠다.

내 잘난 성격과 못난 습관들도 수없이 반복하면서 형성되었다.

운전면허를 취득할 때 솔직히 자동차 조작법만 배우고 면허시험장에 갔다.

브레이크 잘못 밟아서 떨어지고, 언덕에서 뒤로 밀려서 떨어지고, 후진 못해서 떨어지고, 모두 11번을 떨어졌다.

그런데 12번째 시험을 치를 때는 백미러를 보면서 너무 태연하게 운전하고 나오게 되었다.

유능한 선생님의 도움을 받지는 못했지만 반복된 도전과 실패가 모아져서 실력이 되었다.


한 번 읽고 무슨 뜻인지 모르는 글은 여러 번 읽다보면 이해가 된다.

한 번 볼 때는 흐릿했는데 계속 보면 선명해진다.

한 번 만났을 때는 어색했지만 계속 만나면 친근해진다.


모른다고?

재능이 없다고?

실력이 없다고?

도 없는 소리 하지 마라!

몇 번이나 해봤는데?

다시 도전하고 도전하자.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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