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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때문에 시작된 일이었다

by 박은석


사람이 무엇인가를 좋아하게 되는 계기는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부모님에게 칭찬받고 싶어서 부모님이 좋아하는 일을 덩달아 좋아하게 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싶어서 친구들이 좋아하는 가수를 함께 좋아하게 된다.

축구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좋은 성적을 거두는 바람에 갑자기 축구를 좋아하게도 된 사람도 있다.

그림에는 소질도 없고 흥미도 없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가 미대에 다니고 있다고 하면 갑자기 그림과 친해지고픈 생각이 든다.

그래서 괜히 인사동도 얼쩡거리고 전시회에 걸린 그림 앞에서 골똘히 생각하는 척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러다 보면 정말 그것이 좋아진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한 번 두 번 마지못해 따라갔다가 어느새 그것이 취미생활이 되고 나중에는 학문적인 지식을 쌓고 실력을 길러서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되기도 한다.



나로서는 최근 몇 년 동안 고상한 취미가 하나 생겼다.

시골 촌놈 출신인데 감히 종합예술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오페라를 즐겨 보고 있다.

물론 직접 오페라극장을 찾아간다는 것은 아니고 컴퓨터의 도움으로 책상 앞에 앉아서 편안하게 보고 있다.

아직 감상이라느니 비평이라느니 할 정도는 아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이태리 언어로 근 2시간 동안 불러젖히는 노래들을 내가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당연히 자막의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오페라의 배경과 내용을 설명해 준 많은 자료들을 훑어보면서 시청을 한다.

아직 오페라 아리아를 따라 부를 정도의 실력은 아니다.

그야말로 취미생활의 초보 단계를 밟고 있다.


그런데 내가 오페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

우연히 러시아 출신의 소프라노 가수인 안나 네트렙코의 연기를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보통 오페라 가수를 생각하면 조금 부담스러운 넉넉한 체형의 인물들이 떠오른다.

울림통이 커야 노래가 잘 나온다고 해서 그런지 모른다.

그래서 오페라는 가수들의 외모를 보지 말고 노래를 들으라고 한다.

하지만 어디 사람이 그럴 수 있나?

두 눈이 있으니 자연히 배우들의 외모를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안나 네트렙코는 젊고 섹시했다.

에너지가 넘쳤고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연기 도중에 지휘자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대본을 소화했고 자연스럽게 자기 연기를 펼쳤다.

<라 트라비아타>나 <라 보엠>에서는 순수한 사랑을 간직한 비운의 여성으로, <마농>에서는 타락하여 내쳐진 여성으로, <사랑의 묘약>에서는 새침데기 신부로, <피가로의 결혼>에서는 지혜롭고 만만치 않은 하녀로, <청교도>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져버려서 미쳐버린 신부로 자신이 맡은 배역들을 완벽하게 연출하였다.




러시아 볼셰비키 발레단이 되고 싶었는지 청소년 때까지 발레를 하다가 뒤늦게 노래를 배웠다고 한다.

자신보다 훨씬 일찍 노래를 시작한 이들이 있었을 테니까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을까?

괜히 발레를 했나 후회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발레를 배운 덕분인지 그녀의 연기력은 노래만 공부한 이들과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그녀에게 열광을 했다.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에게 자폐증이 조금 있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은 남편은 도망치듯 떠나버렸다고 한다.

배신, 증오, 절망, 좌절,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식을 살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그녀는 견디고 버텼다.


네트렙코의 연기에는 그녀가 겪어왔던 모든 아픔과 눈물이 투영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가 연기한 작품들을 하나씩 구해서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오페라의 늪 속으로 깊이 빨려들고 있다.

한 사람 때문에 시작된 일이었다.


++물론 지금 안나 네트렙코는 나이 50세를 넘어섰습니다. 그녀가 연출한 최고 명작 <라 트라비아타>의 한 대목을 링크 걸어둡니다.

축배의 노래
https://youtu.be/YRaT88qJago?list=RDYRaT88qJago


언제나 자유롭게 (Sempre Libera)

https://youtu.be/NhXV2qoKS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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