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은석 Jan 19. 2021

우리가 한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더 낫지 않을까?

나는 어르신들을 참 많이 만난다.

내가 사는 지역에 어르신들이 많이 거주하시기도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의 특성상 부모님 뻘 되는 분들을 많이 대할 수밖에 없다.

만약 여태까지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팔순을 넘은 어르신이셨을 것이다.

그래서 대략 팔순쯤 되신 분들은 그냥 아버지라고 여긴다.

여자분들도 그렇다.

어머니와 연령이 비슷한 70대 후반은 그냥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그보다 연세가 많거나 적은 분들은 이모님처럼 생각한다.


한번은 여자 어르신과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특별히 나에게 밥을 사주시겠다고 하셔서 뭘 먹겠냐고 하셨다.

누군가 나에게 밥을 사겠다고 하면 나는 국수를 사 달라고 한다.

괜히 비싼 음식점에 가서 어색하게 앉아서 식사하는 게 싫고 국수는 누구나 좋아하니까 메뉴 정하느라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국수는 값이 싸다.

얻어먹더라도, 대접을 받더라도, 내가 부담이 안 된다.




그분은 나에게 좋은 것 먹자고 했지만 나는 한사코 국수를 먹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근처에서 제일 유명한 일본식 우동집으로 데려가셨다.

내가 일본 우동을 알 턱이 있나? 메뉴판의 그림을 보고 하나를 택했고 그분도 다른 것으로 골라서 주문했다.

역시 비싼 음식은 그 이유가 있었다.

아주 맛있었다.

그런데 그분은 한 젓가락 드시더니만 배가 부르다며 젓가락을 내려놓으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분은 면을 안 드신다고 했다.

괜히 나 때문에 우동집에 가신 것이다.


음식이 너무 아깝기도 하고 주문한 것 그대로 치운다면 주인장이 섭섭해할 것도 같았다.

그래서 어르신에게 안 드실 거면 내가 먹겠다고 했다.

당연히 어떻게 당신이 젓가락 한 번 담근 것을 내가 먹느냐며 손사래를 치셨다.

그때 내가 “뭐 어때요. 이모님 같은 분이신데.” 하면서 냉큼 그릇을 뺏어와서 후루룩 우동을 삼켰다.

면발이 끝내주게 맛있었다.




남들은 이런 나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게 편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어머니에게 살갑게 대하거나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적에 아버지와 친하게 지낸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여전히 나를 대하기 어려워하신다.

어머니나 누나들은 내가 말이 없고 조용한 성격의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밖에 나와보면 전혀 딴 사람이다.

어쩌면 집에서 부모님께도 이렇게 하고 싶었는데 자라온 환경이 그렇게 감정을 표출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마음속에 켜켜이 쌓아두어야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이제 와서 엉뚱한 방향으로 내가 만나는 어르신들에게 표현되는 것인가 보다.

전혀 어색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다.


하기는 어려서부터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라고 배웠다.

교회에서는 아담과 하와의 자손으로서 한 형제자매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 같은 식구이고 한 가족이라는 말인데 그렇게 살아가면 되지 않겠는가?




백석 시인이 언젠가 함경도 땅 북관에 갔다가 병에 걸린 적이 있었다.

그때 의원이 와서 진찰을 하는데 의원의 얼굴이 마치 돌부처 같고 관운장같이 수염도 길어서 무슨 신선처럼 거북하게 여겨졌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의원이 백석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다.

평안도 정주라고 대답하니까 그 의원은 아주 친한 친구 중에 정주 사람이 있다며 이름을 댔다.

그랬더니 백석은 그분은 자기 아버지의 친구분이라며 자신도 아버지처럼 대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의원이 다시 조용히 맥을 짚었는데 백석은 그 손길에 아버지의 친구도, 아버지도 같이 있었다고 했다.

그 마음을 살려 <고향>이란 시를 썼다.


생판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아버지를 느낄 수도 있고 어머니를 볼 수도 있다.

서로 이름을 모르고 얼굴을 모른다고 다시는 만나지 않을 남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우리가 한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이 세상은 훨씬 나아질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는 왜 그렇게 사니? 묻는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