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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박은석
Jan 22. 2021
아버지의 기일(忌日)이 오면 마음이 무겁다
사람마다 잊을 수 없는 날이 있다.
자기가 태어난 날, 사랑하는 이와 결혼한 날, 자녀를 낳은 날 등 축하할 날들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거기다가 인생에 큰 업적을 이룬 날들도 추가가 된다.
다 좋은 날이다.
그런데 마음이 차분해지는 날도 있다.
바로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가신 날이다.
1년 364일을 즐겁게 지내다가도 그날만 돌아오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나에게는 그날이 바로 1월 22일이다.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신 날이다.
1993년, 쉰셋의 나이에 아버지는 갑자기 쓰러지셔서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셨다.
이제 조금 있으면 내가 아버지 나이만큼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버지 사진을 보면 지금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찾아오시는 아버지 앞에서 나는 항상 어린 아이다.
머리가 조금씩 빠지고 흰머리가 부쩍 늘어났지만 나는 열 살 남짓한 소년일 뿐이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겨울방학에 잠시 고향에 들렀던 때였다.
한 일주일 있다가 서울로 올라올 생각이었다.
그만큼 나는 이미 서울 생활이 익숙해졌었다.
사춘기 시절을 보내면서 아버지와 두껍고 높은 벽을 쌓고 지냈다.
나는 아버지가 싫었다.
동네에서 멀찍이 보이면 숨어버리고 피해 다녔다.
한번은 목욕탕에서 아버지를 보았는데 들키지 않으려고 도망치듯 나왔던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나중에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면 아들과 함께 목욕탕에 가야지.’ 다짐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싫었다.
아버지처럼만 살지 않으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 마음을 허무느라 1년 2개월 동안 밤마다 기도를 했다.
용서하게 해 달라고 이해하게 해 달라고.
그래서인지 기적처럼 아버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같이 겸상을 해서 밥도 먹고 농담도 할 수 있었다.
아버지와 그런 관계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날은 아버지가 아침에 라면을 끓여주셨다.
둘이 같이 먹으면서 내가 농담을 했다.
앞으로 6년 후에는 아버지 품에 손주를 안겨드리겠다고.
아버지가 웃으셨을 텐데 그 장면은 기억이 안 난다.
식사 후에 아버지는 동네 구멍가게로 가셨고 나는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친구를 기다렸다.
반가운 친구를 만나서 집으로 데려왔는데 구멍가게에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고.
단걸음에 달려갔더니 아버지는 이미 마비증세가 있으셨다.
뇌출혈이라는 것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이미 두 번이나 쓰러지셨던 병력이 있으셨다.
어디서 주워들은 지식으로 피를 빼야 한다며 바늘을 좀 달라고 했다.
구멍가게 주인도 놀랐는지 바늘을 찾느라 허둥댔다.
답답한 마음에 도루코 면도날을 집어 들어서 아버지의 손가락을 벴다.
검붉은 피가 났다.
무서웠다.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곧이어 구급차가 도착하고 그렇게 실려갔다.
하루하루 아버지의 기력이 약해지셨다.
이미 몸의 절반은 마비가 되셨고 말씀도 못 하셨다.
혹시 글씨는 쓰실 수 있을까 해서 스케치북과 매직을 갖다 드렸는데 불가능했다.
그렇게 12일 동안 병상에서 시름시름 약해지시더니 아버지는 마지막 눈을 감으셨다.
나는 영화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처럼 마지막 유언의 말씀은 하실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못 하셨다.
아버지의 살아생전 마지막 말씀은 그 아침에 같이 라면을 먹으면서 한 농담 같은 말뿐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게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을.
어쩔 수 없이 나 혼자만 주절주절 말을 했다.
그러다 한순간 여태 한 번도 아버지를 ‘아빠’라고 불러본 적이 없고, 아버지에게 사랑 고백을 해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말 용기를 내서 말을 했다.
“아빠, 사랑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른 순간이었다.
동생은 해병대에 입대해서 첫 휴가를 나왔는데 아버지를 병원에서 보았다.
가슴이 무너졌을 것이다.
아침 점호 때마다 고향을 향해서 아버지가 건강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이게 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나 한 거냐고?”
그러면서도 아버지에게 “필승!” 경례를 붙였다.
아버지는 씩 웃으며 동생의 군복에 덕지덕지 붙은 낙하산 표시며 계급장이며 훈련을 통과한 표식들을 어루만지셨다.
나보다 먼저 군 입대한 동생이 무척 자랑스러우셨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아버지가 떠난 날은 설 명절 전날이었다.
친척들은 명절 전에 초상집에 가면 부정 탄다며 오기를 꺼렸다.
모든 장례식이 다 슬프지만 아버지의 장례식은 유독 슬펐다.
그래서인가 아버지를 땅에 안장할 때 하늘에서도 눈이 펑펑 쏟아졌다.
교회 공동 묘지가 필요하다고 해서 아버지가 총대를 메고 땅을 구했는데 그곳에 아버지가 묻히셨다.
그럭저럭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갔다.
아버지의 추도일을 음력으로 정하면 자꾸 설 명절과 이어지기에 그냥 양력으로 지키기로 했다.
아버지 때부터 기독교 신앙을 지키셨으니 다른 친척들처럼 제사를 지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그날에 친척들이 우리 집에 찾아오지도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전국 각지에 흩어진 우리 6남매가 아버지 기일에 한자리에 모이기는 어려웠다.
아무리 교통편이 발달했다고 하지만 제주도가 고향인 우리 식구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각자 자기가 있는 곳에서 아버지 기일을 지낼 수밖에 없었다.
십 년 전쯤인가 어머니께서 이제 기일 지키는 것을 그만두자고 하셨다.
어차피 천국에서 만날 것인데 굳이 이 땅에서 그날을 기념하면서 지킬 필요가 있냐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도 그러자고 했다.
하지만 날이 다가오면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식구가 다 그럴 것이다.
몇 년 전에 아버지 기일에 맞춰 전화를 드렸더니 어머니의 목소리에 힘이 없는 게 느껴졌다.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예전에는 이맘때쯤이면 꿈에서라도 나왔는데 그해에는 꿈에도 안 나온다고 섭섭해하셨다.
하! 25년이 지났는데도 어머니는 잊지 못하고 계셨던 거다.
그 밤에 형제들끼리 카톡방에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2시간 넘게 폭풍 눈물을 흘렸다.
그때까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도 슬펐고 힘들었던 것이다.
애써 그 마음을 감추고 꾹 눌러왔던 것이었다.
나도 아버지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안 그런 척 연기했을 뿐이다.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나 보다.
네 살 밑의 여동생이 자기도 그랬던 적이 있었는데 오늘은 오빠에게 그런 날인가 보다고 했다.
다들 살아오면서 그랬던 날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누나들은 우리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아버지였다고 수다를 떨었다.
얼마 전에 어머니가 아버지 사진을 좀 찾아보라고 전화하셨다.
전에 서울 왔을 때 우리 집에 사진을 두고 갔는데 그 사진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나는 본 것도 같은데 당장 안 보이니 우리 집에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며칠 후에 어머니는 다시 분명히 우리 집에 있을 거라고 하셨다.
그래서 책꽂이랑 다 살펴봤는데 정말 있었다.
대학노트 크기만 하게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었다.
아마 첫 조카 돌 때 기념해서 찍었을 것 같은데 그러면 두 분이 쉰 살 언저리였던 때였을 것이다.
스캐너에 넣어서 파일 용량을 작게 그리고 크게 두 가지로 스캔해서 6남매의 카톡방에 올렸다.
필요하면 동네 사진관에서 현상하면 된다고 했다.
어머니께도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드렸다.
팔순 넘으신 우리 어머니는 아직도 카톡이 서투신지 사진을 보내드린 지 1주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숫자 1이 없어지지 않았다.
사진 밑에 내가 짓궂게 쓴 글이 보인다.
“사진 찾아서 보내드립니다. 어머니 미인이시네. 이때 쉰 살 안 되셨나?”
(30년 전 아버지와 어머니. 제 딸은 할아버지를 보고 "아빠다!" 하더라고요.)
이제 내가 아버지의 나이만큼 되었는데 여전히 나는 어린아이와 같다.
그래서 아버지의 기일이 오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버지처럼 용감하게 세상을 살아야 하는데 아직 어린아이 같아서 응석이나 부리고 있는 것 같다.
아버지만큼만 살면 성공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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