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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죄짓고는 못 산다
by
박은석
Feb 1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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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던 시절에 잘 몰라서 저지른 잘못인데 너무나 죄송합니다.”
“피해받으신 분들 마음에 큰 상처가 되셨다니 죄송합니다.”
“술 취해서 저지른 실수였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말들이다.
마치 문장을 한 줄 복사해서 갖다 붙인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철없던 시절은 언제까지이며 철든 시절은 언제부터라고 해야 할까?
술에 취했다는 것을 수치로 표시한다면 알코올 농도 몇부터라고 해야 할까?
터무니없는 말이다.
핑계밖에 안 된다.
그런데 이런 말 한마디라도 하면 정상이 참작된다나?
우리 사회가 그렇게 너그럽다.
가해자에게는.
반면에 피해자에게는 위로하는 척하면서도 가혹하다.
‘그럴 만하네’, ‘실수라잖아’, ‘그때는 뭘 알았겠어? 나이도 어린 때였는데’라며 쉽사리 동정표를 던진다.
잠깐 고개 숙이고 숨어 지내다가 사람들이 잊을 만하면 그때 살짝 다시 등장하면 된다고 조언까지 해 준다.
열 살이나 되었을까?
고만고만한 나이 때였다.
동네에 지적장애인이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일고여덟 살 많았을 것이다.
성이 홍씨였는데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
리는 그냥 ‘병신’이라고 불렀다.
길에서 만나면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지나쳐갔다.
나와 내 친구들은 그의 뒤를 따라가며 실컷 골려주고 욕을 하고 때로는 돌팔매질을 하기까지 했다.
동네 어른들 말에 그의 부모가 밭에 갈 때면 그를 집 기둥에 묶어둔다고 했다.
나는 기회를 봐서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보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침 그 홍씨네 집을 들여다볼 기회가 생겼다.
그의 부모가 분명 밭에 간 시간이라 생각하고
나는 그의 집 사립문을 열고 살금살금 들어갔다.
그리고 시골 초가집의 엉성한 창문을 살짝 열어서 집안을 살펴보았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광경을 잊을 수가 없다.
동네 어른들의 말이 사실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심했다.
방인지 아닌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그가 있었던 공간은 지저분했다.
그냥 외양간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곳 기둥에 긴 줄을 매달았는데 그 줄 끝에 그의 몸이 묶여 있었다.
마치 짐승을 묶어 놓듯이 그렇게.
아마 배우지 못한 그의 부모는 자신들이 없는 사이에 그가 이웃들에게 폐를 끼칠까 염려해서 그렇게 묶어두었던 것 같다.
그는 몸이 묶인 채로 줄이 닿는 거리만큼 나아갔다가 다시 기둥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창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본 나는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서 도망치듯이 그 집을 빠져나왔다.
그 후로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그가 보이면 애써서 길을 돌아가곤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잊히지가 않는다.
철없던 어린 시절이었다고?
몰랐다고?
실수였다고?
그때는 다 그랬다고?
아니다!
내 양심은 알고 있었다.
그것들은 잘못이고 죄였다!
어린아이들은 죄를 모르는가?
그렇지 않다.
아이들도 무엇이 잘못이고 무엇이 잘한 일인지 다 안다.
브라질의 작가 바스콘셀로스가 지은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의 주인공 제제는 고작 5살이다.
그 꼬맹이가 유독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
별명이
포르투갈 아저씨이다.
제제는 그 아저씨를 혼내줄 방법이 없으니까 속으로 미워하기로 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포르투갈 아저씨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때 제제는 큰 충격에 빠진다.
마음속으로 미워하기만 해도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다섯 살 꼬맹이가 깨달은 것을 우리가 몰랐다고 할 수 있을까?
단순히 철없던 때 저지른 실수였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밖에 없다.
사람이 죄짓고는 못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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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석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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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2009년 1년 200권 읽기 운동 시작. 2021년부터 1년 300권 읽기 운동으로 상향 . 하루에 칼럼 한 편 쓰기. 책과 삶에서 얻은 교훈을 글로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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