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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이 가장 아름답다

by 박은석

금요일 아침이 되면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는다.

한 주간이 후딱 지나가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주말을 기다리는 설렘보다 지난 월화수목 4일 동안 무엇을 했나 싶은 허탈감이 든다.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것 같다.

특별하게 기억나는 일도 없다.

그날이 그날 같다.

분명 월요일에는 뭔가 해 보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것마저 기억이 안 난다.

지난주에도 그랬고 그 지난주에도 그랬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덜컥 한 살 더 먹고 또 한 살 더 먹었다.

“인생 뭐 별다른 것 있겠어?”라고 하는 말이 남의 말이 아닌 것 같다.

내 인생도 별다른 것 없이 흘러왔고 또 그렇게 흘러갈 것만 같다.

아쉽다.

뭔가 큰 족적을 남기고 싶었는데 이 나이가 되도록 이룬 것이 없다.

어렸을 적에 부모님이 흥얼거렸던 창가 풍의 노래가 생각난다.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공명 장수는 무엇하리요.”




서양미술 양식 중에 16세기 중반 네덜란드에서 성행했던 바니타스 화풍이 있다.

이 바니타스(Vanitas)라는 말은 성경에서 솔로몬이 외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Vanitas vanitatum omnia vanitas, 전도서 1:3)”에서 따왔다.

바니타스 회화들은 시들어 있는 꽃이나 과일, 여위고 병약한 사람의 모습, 연기처럼 사라지는 그림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전까지의 그림이 실제보다 더 화려하고 완벽한 형태와 균형미를 표현한 것에 비하면 바니타스화는 굉장히 혐오스럽기까지 한 그림들이었다.


화가들은 화려한 꽃과 탐스러운 과일도 시들 때가 있고 건강한 사람도 늙고 병약해진다는 사실을 화폭에 담으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의 그림을 보면 괜스레 마음이 착 가라앉고 거북한 느낌이 들면서 인생이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그림을 통해 표현하려고 했던 것도 바로 그런 마음이었다.




화가들도 기왕이면 그림을 실제보다 더 아름답게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았다.

탐스러운 사과를 자세히 보니 시들은 구석이 있고 벌레 먹은 곳도 있었다.

또 조금 있으면 썩어 없어질 것이 뻔하다.

이 모든 것이 사과의 실제 모습이다.

어느 한순간의 모습만을 가지고 ‘이것이 사과이다’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가장 화려했던 순간을 그려왔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기괴한 그림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당시 유럽의 시대적인 분위기도 바니타스화와 비슷했다.

흑사병이 전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지리상의 발견으로 경제가 성장하고 르네상스 운동으로 문화가 발달하여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했었는데 한순간에 다 물거품처럼 허물어지고 말았다.

‘인간의 수명은 유한하며 끝이 있는데 금과 은이 많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꽃이 화려하게 피었다가 시들 때가 있는 것처럼 한때는 건강했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약해진다.

지식이 풍부했던 사람도 망각의 때를 보낼 때가 있고 부유했던 사람도 가난하게 될 때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언젠가는 볼품없는 모습으로 시들어버리는 ‘바니타스’들이다.

그러니 그 헛된 바니타스에 인생을 걸지 말라고 화가들은 소리 없는 가르침을 주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니타스화가 허무함을 찬양한 그림이라고 할 수만도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꽃은 시들기 때문에 예쁘고 인생은 불완전하기에 아름답다.

조화는 늘 화려하게 피어 있고 시들지도 않지만 한두 번 보면 그다음에는 관심이 가지 않는다.

시들지 않으면 아름다움도 없다.

이제 곧 시들 것을 알기에 지금 한순간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아름답다.

허무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다.


-바니타스 설명-


https://ko.m.wikipedia.org/wiki/%ED%8C%8C%EC%9D%BC:Antonio_de_Pereda_-_Allegory_of_Vanity_-_Google_Art_Project.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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