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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이름 너머에 또 다른 이름이 있다
by
박은석
Mar 1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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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처음으로 전축이 들어온 날 아버지는 진종일 레코드판을 돌리셨다.
전축이라는 기기를 처음 봐서 그런지 그날 내 귀에 들린 첫 음악이 잊히지 않는다.
“당신은 모르실 거야 얼마나 사랑했는지... 이름을 불러주세요. 나 거기 서 있을게요.”
혜은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름을 불러달라니, 이름이 그렇게 중요했나 싶었다.
그렇다. 이름은 참 중요했다. 이름은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큰놈, 작은놈, 막둥이’로 불렸지 이름은 아껴 부르곤 했다.
특히나 웃어른의 이름은 아랫사람이 부르면 안 되는 금기처럼 여겼다.
대신 숱한 별칭, 별명을 불렀다.
세종대왕의 ‘세종’이란 이름은 죽은 다음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니까 세종대왕이 살았을 때는 그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었을 거다.
세종대왕의 이름이 ‘이도’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흔치 않다.
우리는 그분을 시대가 지난 다음에 붙여진 이름 ‘세종’으로 기억한다.
사람에게만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에, 생명체에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붙이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것들과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사람이 살아갔던 시대에도 이름을 붙인다.
고려시대, 조선시대, 대한제국시대, 대한민국시대처럼.
물론 왕조의 구분은 통치권자인 왕이 누구냐에 따라 붙여진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왕조의 이름으로 자신의 시대를 부른다고 해서 거부할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또 고대시대, 중세시대, 근대시대, 현대시대 같은 이름으로 시대를 구분하여 부른다.
서양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난 때를 기준으로 나눈 것이다.
예술계에서는 바로크시대, 로코코시대라는 말도 꺼내 들었다.
철학 쪽에서는 '이즘'이란 말을 붙여서 시대 구분을 한다.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처럼 말이다.
이렇게나 저렇게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좋다.
하지만 한 번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으로 그 존재를 규정지어버린다.
그 이름으로 그 시대를 평가해 버린다.
어디 그런가?
연필이란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글 쓰는 일만 할까?
연필과 공책을 서로 맞바꿀 때는 물물교환의 화폐 기능을 하고 연필치기를 할 때는 놀이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귀가 간지러울 때는 귓구멍을 파는 귀이개 역할도 하고 머리를 긁을 때는 머리빗의 역할도 한다.
물론 연필의 주된 역할이 글을 쓰는 도구이지만 그것만 하는 물건이라고 한정지을 수는 없다.
20세기 초반에 살았던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더니즘시대를 살았다고 할 수도 없다.
어떤 사람은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흔히 생각하는 모더니즘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지구 한 편에서는 석기시대처럼 돌도끼를 들고 다닌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니까 20세기 초반은 모더니즘시대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말 한마디로 사람을, 사물을, 시대를 규정해버린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신호등에 파란불이 들어오면 지나가란다.
그런데 신호등 불빛이 파란불인가? 초록색인가? 녹색인가?
다양한 빛의 스펙트럼이 있는데 무지개색은 왜 빨주노초파남보 7 가지 색이라고만 하는가?
우리에게는 딱 잘라서 일반화시켜버리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다.’
한마디로 평가해버리면 이해하기가 너무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 한마디로 그 사람을 다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도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감히 나를 자기들이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내가 정의한 그 한마디가 틀이 되어 그 사람을 그 속에 가두고 사물을 가두고 시대를 가둬버린 것은 아닌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그 이외의 것은 철저히 잘라버린 것은 아닌가?
하나의 이름 너머에 또 다른 이름이 있다.
누구에게는 남편이고 누구에게는 아버지이고 누구에게는 할아버지가 된다.
하나의 이름으로 다 안다고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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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석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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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2009년 1년 200권 읽기 운동 시작. 2021년부터 1년 300권 읽기 운동으로 상향 . 하루에 칼럼 한 편 쓰기. 책과 삶에서 얻은 교훈을 글로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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