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덩어리 인생을 소개합니다

by 박은석


벌써 15년이 지난 일이다.

70세가 넘은 부부가 서른아홉 살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 외에 두 자녀가 더 있었는데 모두 결혼해서 잘살고 있었다.

부모와 함께 살던 서른아홉 살 아들은 뇌성마비 장애인이었다.

나는 그분들을 만나기 전에도 뇌성마비 장애인을 몇 번 대했던 적이 있었다.

말 한마디 하려면 온몸을 비틀어야 하고 혼자서는 일상생활을 전혀 할 수 없는 삶이 뇌성마비 장애인의 삶이었다.


그도 다르지 않았다.

태어날 때는 건강했다.

하지만 두 살 때인가 심한 열병을 앓았는데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를 업고 용하다는 의사를 찾아 전국을 다녔다고 하셨다.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

아버지는 고향이 북쪽이라고 하셨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차출되어 원치 않는 전쟁에 참전했다가 유엔군에 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셨고 그곳에서 마음을 굳혀 북쪽으로 가지 않기로 했다.

그다음은 엄청 억척스럽게 사셨다.




늦은 나이에 결혼하여 가정을 일구셨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하늘 아래 혈혈단신이었는데 얼마나 기쁘셨을까?

그런데 그 아들이 중병에 걸린 것이다. 하늘이 원망되고 인생이 저주스러우셨을 것이다.

의사가 고개를 가로저을 때마다 절망감이 밀려왔을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몸에 좋다는 약은 다 먹였다.

하지만 고칠 수 없었다.

극단적인 선택?

왜 안 해 봤겠나?

생각은 이미 지구 끝까지 몇 번이고 다녀왔다.


어쨌든 살아야 했다.

살려야 했다.

그러려면 마음을 고쳐먹어야 했다.

저주스러운 인생인데 마음을 확 바꿔서 복덩어리 인생이라고 부르기로 하셨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는 ‘우리 집 복덩어리’라는 별명을 붙이셨다.

매일 “복덩어리야 복덩어리야!” 부르셨단다.

그래서일까 딸도 한 명 낳고 아들도 또 한 명 낳았다.

건강하게 잘 컸다.

둘째 아들은 내 대학 후배이다.

학과는 다르지만 같은 단과대학을 나왔다.




그 집에 처음 방문하는 손님은 큰아들과 꼭 인사를 나누게 했다.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뇌성마비 장애인을 맞닥뜨리는 사람들의 표정은 천태양상일 것이다.

그때의 얼굴표정을 식구들은 예의주시한다.

조금이라도 찡그리는 인상이라면 ‘우리 집안에 들일 사람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뇌성마비 장애인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우리 식구’라고 생각한다고 하셨다.

그렇게 사위도 얻었고 며느리도 얻으셨다.


노부부는 큰아들을 ‘복덩어리’로 부르기 시작하니까 마음도 좋아지고 몸도 좋아지고 인생도 좋아졌다고 하셨다.

동대문에서 포목점을 크게 열어 돈도 많이 버셨다.

주름살 가득한 얼굴이지만 웃음도 가득하셨다.

그분들이 나에게 인생의 소원이 뭔지 아냐고 물으셨다.

내가 궁금하다고 했더니 아들보다 하루라도 오래 사는 거라 하셨다.

매일 새벽마다 그렇게 기도한다고 하셨다.




부모님의 마음을 알고 있었는지 아들은 매일 노래 부른다고 하셨다.

“나...마...흔...살...에...천...국...가...요...”

온몸을 비틀며 그 말을 반복했다.

그 짧은 한 문장을 말하는데 1분은 걸렸던 것 같다.

나도 생생하게 들었다.

“에잇! 그런 말 하지 마세요.”라며 핀잔주듯이 말하고 왔다.

해가 바뀌어 2005년 3월 1일에 다급한 전화를 받고 그 집으로 뛰어갔다.

편안하게 누워 있는 그의 눈을 내 오른손으로 감겨드렸다.

현봉헌 씨, 그의 나이 마흔 살이었다.


나는 그가 분명 천국에 갔을 것이라고 믿는다.

거기서는 아프지도 않고 어눌하게 말하지도 않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할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 천국이다.

그는 한평생 제대로 걸어보지도 못했다 바깥세상을 누리지도 못했다.

그래서 불행했냐고?

아니다.

그는 행복했다.

복덩어리였다.

그리고 그를 키운 부모님도, 그의 가족도, 그를 만난 사람도 다 복 받은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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