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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쓴다
오늘은 그냥 좋은 날이었으면 좋겠다
by
박은석
Mar 16. 2021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니?”
이렇게 물으면
“응, 그 사람 잘생겼고, 키 크고, 똑똑하고, 매너 좋고, 부드럽고, 웃기고, 돈 잘 벌어”
이런 말이 툭 튀어나올 것 같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선뜻 대답을 못 한다.
머뭇머뭇거리며 적당한 단어를 찾아보다가 그것도 내키지 않은지
“그냥, 그냥 좋아.” 하고 만다.
특별한 것, 특기, 장점을 꼽으라면 딱히 없다.
얼굴이 아주 잘생긴 것도 아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올 만큼은 아니다.
능력이 특출한 것도 아니다.
어떤 때는 재미있고 편하지만 어떤 때는 따분하고 불편하다.
그 나이에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재산을 많이 모은 것도 아니다.
길거리를 걷다 보면 이런 사람은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람에게 마음이 간다.
함께 있으면 좋다.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누가 물어보면 “그냥, 그냥 좋아”라고 대답한다.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냥 좋다.
‘그냥’이라는 말은 좋다, 싫다, 관심 없다 등 어떤 감정 상태에서도 쓸 수 있는 말이다.
전라도 사람들의 ‘거시기’와 쌍벽을 이룰 수 있는 말이다.
스무 살 때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 함께 부른 노래가 있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곡에 맞춘 노래다.
‘첫날밤에 첫날밤에 첫날밤에 첫날밤에.... 첫날밤에 그냥 잤다.’
어떤 반전이 있나 기다렸는데 ‘첫날밤에’만 부르다가 ‘그냥 잤다’로 끝을 맺어서 엄청 웃었다.
원태연 시인은 이 말을 가지고 <그냥 좋은 것>이란 시를 썼다.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어디가 좋고
무엇이 마음에 들면
언제나 같을 수는 없는 사람
어느 순간 식상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특별히 끌리는 부분도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 때문에 그가 좋은 것이 아니라
그가 좋아 그 부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냥 좋은 것이
그저 좋은 것입니다”
‘그냥’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색이 없다.
자기 색깔을 없애고 어디에나 어울린다.
고집 피우지도 않는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는다.
조건을 붙이지도 않는다.
있는 모습 그대로, 지금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냥’이다.
그래서 왜 좋냐고 물어보면 “그냥”이라고 대답한다.
딱히 이유가 있어서 좋은 것이 아니라 그 모습 그대로가 좋다는 거다.
발길이 저절로 움직이고 마음이 저절로 콩닥콩닥 뛰는 것이 ‘그냥’이다.
그래서 어쩐 일로 왔냐고 물으면 “그냥”이라고 대답한다.
발걸음을 막지 못하고 마음을 잡아 붙들어 맬 수가 없었다는 거다.
가만히 있어도 보고 싶고 그리운 것이 ‘그냥’이다.
그래서 어쩐 일로 전화를 걸었냐고 물으면 “그냥”이라고 대답한다.
전화번호를 누르고 신호음이 가는 것만으로도 좋다.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면 더없이 좋다.
“여보세요?”라는 한마디만 들어도 기분이 좋다는 거다.
오늘 하루는 ‘그냥’ 좋은 날이었으면 좋겠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다.
아침에 현관문을 나서서 사무실에 가고, 내 자리에서 한나절 지낸 후 저녁에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저 그런 날이어도 좋다.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면 짧게 ‘그냥...’ 한마디만 해도 오케이다.
너무 특색이 없다고, 밋밋하다고, 그게 뭐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어떻게 매일매일이 드라마틱한 날로 채워질 수 있겠나?
그렇게 특별한 날이 되려면 얼마나 심한 긴장과 스트레스를 감수해야 하는지 아는가?
흥분지수가 머리끝까지 치솟는 날들은 가끔씩 찾아오는 게 낫다.
그리고 대부분의 날은 그냥 그런 날이었으면 좋겠다.
그냥 아무 일 없는 날, 그냥 편안한 날, 그냥 기분 좋은 날.
그런 날이 그저 좋은 날이다.
오늘 사람들에게 ‘그냥’이라는 말을 참 많이 할 것 같다.
모두들 그냥 평안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냥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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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석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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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2009년 1년 200권 읽기 운동 시작. 2021년부터 1년 300권 읽기 운동으로 상향 . 하루에 칼럼 한 편 쓰기. 책과 삶에서 얻은 교훈을 글로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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