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질을 하다가 문득 ‘칫솔은 언제부터 만들어졌지?’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또 발동한 것이다. 호기심이.
남들은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 쓸데없는 생각 같은 것이 쓸데 있는 생각이 될 때가 많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인간의 삶이라는 게 옛적에나 지금이나 아니면 미래의 어느 날이나 그 모습은 비슷할 것이다.
호기심이 생겨서 이렇게 저렇게 궁리도 해 보고, 이렇게 한 번 저렇게 한 번 만져보면서 무엇인가를 만들고 또 부순다.
그리스신화는 인간이 호기심 때문에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서 결국 신의 심판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호기심이 없다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나?
인간의 모든 삶이 매 순간 호기심을 느끼며 그 호기심을 해결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호기심은 우리 머릿속 생각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호기심을 싹 빼버리면 그야말로 생각 없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아르키메데스는 목욕탕에 앉아있던 순간에도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유레카’를 외칠 수 있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어이 좋다. 시원하네!” 하며 때나 밀고 있었다면 순금의 질량을 측정할 수 있는 비결을 깨달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작 뉴턴은 사과나무 아래에서도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어! 사과가 떨어졌네. 먹어볼까?” 하며 휴식만 즐겼다면 현대 물리학의 발전은 그만큼 더 늦어졌을 것이다.
인간 문명 발전에 있어서 그 어느 것 하나라도 호기심이 없이 만들어진 물건도 없고 호기심 없이 발전한 것도 없다.
호기심 때문에 이만큼 알게 되었고 호기심 때문에 이만큼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종종 호기심을 감춰버리고 눌러버리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괜한 시간 낭비라는 것이다.
하지만 호기심이 살아나지 않으면 우리의 삶도 살아나지 못한다.
나의 호기심은 일단은 사람이나 사물, 지역의 이름의 뜻이 무엇일까에 대한 궁금증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니까 어느 지역을 방문하게 될 때면 ‘이 동네의 이름은 왜 이렇게 지었을까? 무슨 뜻일까?’ 생각해 본다.
한자 이름이면 그 뜻을 찾아본다.
동네의 이름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 지역의 자연환경에 맞춰 붙여지든지, 그 지역에 있었던 역사적인 큰 사건을 기리면서 지어졌기 때문에 이름 뜻을 살펴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큰 것들을 얻게 된다.
경주와 상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전주와 나주 중심의 전라도, 충주와 청주를 중심으로 충청도, 강릉과 원주 중심의 강원도, 그리고 수도 서울의 경계에 있는 경기도.
이만큼을 알고 나면 그 지역을 방문할 때 느낌이 다르다.
도대체 옛날에는 이 지역이 어땠길래 주요 도시가 되었고 지금은 그 명성을 어떻게 이어가고 있나 궁금해진다.
호기심 때문에 지식의 영역이 더 깊고 넓어졌다.
그 호기심이 오늘은 양치질하는 순간에 터져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나와 같은 호기심을 가졌던 사람들이 있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검색하고 검색했더니 1500년 경에 중국에서는 막대기에 천을 두른 모양의 칫솔을 만들어 쓰고 있었다.
문화의 교류로 이것이 유럽에 전해졌는데 당시에는 기발한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770년경에 영국에서 감옥생활을 하던 윌리엄 에디스라는 사람이 고기 뼈에 빳빳한 돼지털을 끼워 넣어 오늘날과 비슷한 칫솔을 만들었는데 출감 후에 그것을 상품화하여 떼돈을 벌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세계 모든 지역에 칫솔은 있었다.
얇은 나뭇가지가 칫솔이 되기도 했고, 나뭇잎이 칫솔이 되기도 했고, 소금이 칫솔이 되기도 했다.
어느 것이 최초의 칫솔이라고 할 수는 없다.
길고 긴 인류 역사에서 최초라는 말은 쉽게 붙일 수가 없다.
이렇게 호기심 때문에 오늘도 많은 공부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