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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May 10. 2021

아버지는 큰 산과 같았다


어렸을 적 나에게 아버지는 큰 산과 같았다.

그 산이 너무나 커서 다른 산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주고 감싸주는 뒷산처럼 아버지는 크고 강한 분으로 각인되었다.

아버지는 맨손으로 소를 잡을 정도로 힘이 센 장사이셨다.

동네에서는 그런 아버지를 ‘박장군’이라고 불렀고 자연스레 나는 ‘박장군 아들’이 되었다.


입담이 좋으셔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놓으실 때는 그 이야기에 홀딱 빠졌었다.

싸움 말리는 선수이셨던 아버지는 동네 아저씨들끼리 싸움이 나면 꼭 그 자리에 가 계셨다.

여름이면 바다낚시를 좋아하셨고 겨울이면 가끔 산에 올무를 놓아서 꿩을 잡고 노루도 잡으셨다.

글씨도 잘 쓰고 노래도 잘 부르고 그림도 잘 그리고 손재주가 참 많으셨다.

책을 좋아하셔서 월부 책장수가 지나갈 때면 꼭 불러서 책을 살까 말까 저울질을 하셨다.

덕분에 누나들은 다 책벌레라는 별명을 얻었다.




내가 머리가 조금 커지자 아버지라는 산은 온데간데없어진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의 팔 힘은 여전히 강했지만 나는 더 이상 아버지와 팔씨름을 하지도 않았고 그 팔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아버지와 나는 수준 차이가 나는 것을 느꼈고 내가 무슨 공부를 하는지 아버지가 들여다보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당연하다.

나는 이제 아버지가 모르는 공부를 하는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집에 오면 아버지는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보셨고 나는 내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한집에 살고는 있었지만 아침 일찍 잠깐 그리고 밤늦게 잠깐 보는 정도였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인생의 주름이 깊게 새겨졌고 깡다문 입술 사이로 가끔씩 한숨소리가 새어 나오곤 하였다.

아버지는 산이 아니라 누구나 밟고 지나가는 낮은 들판처럼 보였다.

세상에서 힘없고 약한 사람이 아버지이셨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절대로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제는 아버지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의 손을 잡지 않고도 나 혼자 보란 듯이 산을 오를 수 있었다.

그런 나 자신이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힘껏 산으로 향했다.

한창 산길을 걷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내 앞에 있어야 할 산이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다.

산속에 들어가면 산이 보이지 않는다.

산을 정복하듯이 아버지를 정복하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안 보이니 왈칵 겁이 났다.

그러나 내 눈앞에 아버지가 안 보이는 것은 아버지를 정복하고 지나쳐왔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아버지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속을 헤매다 보면 내가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상에 올랐다고 해서 대단한 힘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산 정상도 한 평 흙과 바위로 이루어진 땅이다.

정상은 한 번도 정복당한 적이 없다.

단지 사람들에게 밟을 수 있는 기회를 준 것뿐이다.     




산 정상에 올라서면 그때에야 비로소 내가 지나온 산이 자세히 보인다.

얼마나 큰 산인지, 얼마나 험준한 골짜기가 있는지, 얼마나 넓은 세상을 감싸고 있는 산인지 알 수가 있다.

더 이상의 무거운 짐은 없고 홀가분해진다.

산은 나에게 가장 높은 곳에서 서게 해 준다.

그때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버지도 나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게 해 주려고 아버지의 어깨 위에, 머리 위에 나를 올려주셨다.

그때 나는 아버지와 하나가 되었었다.

마치 산 정상에서 내가 산의 일부가 된 것처럼 말이다.


결혼을 아이를 낳아 나도 아버지가 되었다.

하나의 산이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산에 오르라고 손짓을 하고 있다.

아이들이 ‘나’라고 하는 산에 기가 죽게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나를 밟고 올라가서 정상에 이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딱 아버지만큼만 하면 된다.

그런데 쉽지가 않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참 대단한 분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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