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은석 May 12. 2021

양화진에 가면 경건해진다

서울지하철 2호선 합정역 7번 출구를 나와 전철길을 따라 한강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오른쪽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이 있다.

마포나루를 끼고 있는 양화진(楊花津, 버드나무꽃 나루) 일대는 한강을 중심무대로 하였던 조선시대의 교통과 국방의 요충지였다.

전국 각지의 생산물이 인천 제물포를 통해 이곳으로 들어왔고, 내륙의 물류는 한강을 따라 이곳에 내려진 후 한양 도성과 궁궐로 들어갔다.

물류가 흐르는 곳은 국방의 요충지이기도 하기에 이곳에 군대가 주둔하는 군진(軍鎭)을 설치하였다.


조선 후기 서구세력과의 물리적인 충돌은 주로 바다와 강줄기를 따라 일어났는데 양화진도 그중 한 곳이었다.

1866년에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에 항의하기 위해 프랑스 군함이 양화진까지 침범했다가 10월에 강화도에서 조선군과 대결한 병인양요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조선의 쇄국정책은 더욱 강화되었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도 가중되었다.


서양 오랑캐에 의해 더럽혀진 한강을 사교도(邪敎徒)들의 피로 다시 씻는다고 하면서 양화진 앞에서 천주교도들을 대거 숙청하였다.

그래서 그곳을 절두산(切頭山)이라고 부른다.




1884년에는 급진 개화파에 의해 갑신정변이 일어났는데 그 와중에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익이 칼에 맞아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다.

그때 마침 미국 외교관으로 입국해 있었던 알렌의 치료 덕택에 민영익이 회생하게 되었다.

이에 감격한 고종황제는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이후 제중원으로 명칭이 바뀜)을 설립하는 등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조선 복음화를 위해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들이 인천 제물포항을 통해 속속 입국하였다.


알렌에 이어 광혜원의 원장이 된 헤론(J.W. Heron)은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을 돌보던 중 자신도 이질에 걸려 1890년 7월 26일에 34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하지만 당시에 외국인인 헤론의 시신을 매장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도성인 한양에는 묘를 쓸 수가 없었고 외국인 묘지가 있는 인천 제물포까지 시신을 옮기는 일은 7월 장마와 삼복더위 중에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유족과 선교사들은 한양에서 가까운 곳에 매장지를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고종황제는 특별한 배려를 하여 양화진에 외국인들을 매장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고 그곳에 선교사들이 한 분씩 묻히면서 외국인선교사 묘역이 되었다.




양화진 묘역에 세워진 비석에는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을 세운 언더우드 선교사, 

배재학당을 세운 아펜젤러 선교사, 

한국 사람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다고 칭송받으며 YMCA 초대회장을 지낸 헐버트 선교사,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이화학당을 세워 여성 교육을 시작한 스크랜튼 선교사, 

청일전쟁 당시 부상당한 사람들을 치료하며 결핵퇴치를 위해 애쓴 호레이스 홀 선교사,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유럽에 조선의 상황과 일제의 만행을 알린 영국인 베델 선교사 등이 있다.


묘원을 조용히 거닐다 보면 묘비에 쓰인 글귀를 한 글자 한 글자가 가슴에 와 닿는다.

이역만리 조선에 와서 조선인들을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았던 그분들의 피와 눈물과 땀방울들이 고맙다.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기 위한 선교사들이었지만 그분들은 단순히 기독교만 전한 것이 아니었다.

학교를 세워 가르쳤고 병원을 세워 치료했으며, 고아원을 세워 돌봐주었다.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고개가 저어진다.

그래서 양화진에 가면 경건해진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한 헐버트.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헐버트 선교사)”


“내가 조선인의 가슴에 청진기를 댈 때 언제나 나의 청진기도 그들의 심장 소리와 함께 두근거렸다. 나는 아직도 조선을 사랑한다.(홀 선교사 가족)”


“만일 내게 천 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캔드릭 선교사)”


“내가 조선에서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조선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캠프벨 선교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