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사 은행나무를 보면서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용문사에 들어서면 커다란 은행나무가 긴 가지를 드리우며 맞이한다.
그 키가 40미터가 넘는다고 하니 15층 아파트와 맞먹는 높이다.
나무줄기의 둘레는 14미터이고 나뭇가지가 뻗어나간 길이도 사방 14미터나 된다고 하니 가지의 이끝에서 저 끝까지 28미터이다.
사진기에 그 나무의 전체 모습을 담아보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겨우겨우 어떻게 프레임에 집어넣는다 하더라도 사진으로는 그 크기를 가늠할 수가 없다.
이런 것은 직접 가서 눈으로 봐야 한다.
우리나라 은행나무 중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이며 가장 큰 나무라고 한다.
나무의 나이는 대략 1,100살 정도라고 하는데 일각에서는 1,500살은 되었다고도 한다.
20세기의 100년, 조선 500년, 고려 500년을 합쳐도 1,100년인데 나무는 그 이전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까마득한 그 옛날부터 나무는 그 자리를 지켜왔다.
용문사는 신라 진덕여왕 통치 3년 되던 해인 649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은행나무는 그 이후에 심었다고 하는데 쪼끄만 나무를 심은 것인지 이미 큰 나무를 심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심었다고도 하고 의상대사가 이곳에 들러서 지팡이를 꽂고 갔는데 그 지팡이에서 싹이 나고 가지를 뻗었다고도 한다.
세종대왕께서는 이 나무에게 당상직첩(堂上職牒)이라는 벼슬을 내리셨다.
그러니 그 앞을 지날 때 나 같은 상놈들은 머리를 숙여야만 했을 것이다.
나무 팔자가 사람 팔자보다 낫다.
천년을 살아왔으니 이 나무에 얽힌 이야기도 엄청 많다.
언젠가 이 나무를 베려고 했는데 나무에서 피가 나오고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고 천둥이 우르릉 꽝꽝 내려쳐서 무서워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일제가 이 사찰을 불태울 때도 나무는 불타지 않았다고 한다.
나라에 큰 이변이 생길 때에도 이 나무가 무슨 징조를 먼저 보인다고 한다.
고종황제가 승하하던 해에는 커다란 나뭇가지가 하나 부러졌다고 한다.
1945년 8월 15일이나 1950년 6월 25일에는 나무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고도 한다.
누가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런 전설들이 전해져 내려오니까 이 나무를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험한 힘이 있는 나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이 은행나무를 보러 온다.
사람들이 드나들면 경제효과가 발생한다.
학자들은 이 은행나무를 잘 보살피면 앞으로 200년은 더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동안 발생하게 될 경제효과는 어마어마하다.
이 나무는 약 1조 7천억 원의 경제가치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이 나무가 쓰러지지 않도록 받침목을 받치고 피뢰침도 세워뒀다.
용문사의 주인공은 절 자체가 아니라 이 은행나무인 것 같다.
은행나무를 베려고 톱을 댔을 때 정말 나무에서 피가 나왔겠나?
일제가 절을 불태울 때 은행나무에서 방화장치가 작동했겠나?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다가 베임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불에 그을리기는 했어도 살아남았다.
해마다 나뭇가지 몇 개는 부러졌을 텐데 고종황제의 승하 때와 연결시켜 해석했을 뿐이다.
바람이 불면 나무에서 소리가 나는 게 당연하다.
그 소리를 나라의 큰일과 연관시켜 이야깃거리로 만든 것이다.
나무가 영험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무를 영험하게 보는 것이다.
이유는 한 가지다.
나무가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신라가 망하던 때에도 살아 있었고, 고려 500년, 조선 500년, 20세기의 100년을 지내는 동안에도 살아남았다.
숱한 난리와 천재지변 속에서도 버텨냈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니, 살아남았더니 전설이 되었다.
용문사 은행나무에 바람이 분다.
소리가 들린다.
“살아남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