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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May 13. 2021

알 듯 알 듯 모르는 게 많은 세상


아주 작지만 내가 용을 써도 도저히 들어 올리지 못하는 것이 있다.

눈꺼풀이다.

어떤 사람은 눈꺼풀이 내려오는 힘을 막으려고 투명 테이프를 붙여보았다는데 성공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나도 아직껏 눈꺼풀의 힘을 막아본 적이 없다.

별로 무게가 나갈 것 같지도 않은데 기껏해야 몇 그램 정도일 뿐인데 그게 그렇게도 무겁다.

크다고 해서 다 무거운 것은 아니다.

설악산 흔들바위는 그 큰 덩치를 자랑하지만 어린아이가 밀어도 흔들거린다.

그런데 덩치가 크다고 무게가 많이 나온다고 그 앞에서 주눅이 들어서 한 번 흔들어보지도 못한 채 발걸음을 돌렸던 때가 많았다.

작은 것이라고, 무게가 얼마 안 나간다고 만만하게 봤다가 그 앞에서 세월 다 보내고 기력 다 빼앗긴 경우는 또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큰 것은 무겁고 작은 것은 가볍다는 생각이 철저히 무너질 때가 있다.

잘 안다고 했는데 잘 몰랐던 것이다.




가까이 있으면 잘 보인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손바닥을 펴서 내 손바닥을 자세히 보려고 눈앞에 바짝 갖다 대었다.

그랬더니 한낮인데도 캄캄하였다.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가까이 있다고 해서 잘 보이는 것이 아니다.

나는 매일 지구에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한 번도 지구의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사진을 보고 ‘아! 이게 지구구나!’ 생각했을 뿐이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내 몸의 일부처럼 붙어 있는데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이 지구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가 지구는 둥글다고 말을 했을 때 사람들은 “미친놈!”하고 욕을 했을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지구에 대해서는 자신들도 아는 게 있다고 생각을 했으니까 말이다.

“저 양반들이 맨날 공부만 하다 보니까 머리가 돌아버렸군!” 그렇게 수군대며 손가락질을 했을 것이다.

그들은 잘 본다고 했는데 사실은 잘 보지 못했다.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을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함께 사는 사람이라고 다 안다고 할 수가 있을까?

그렇지 않다.

아무리 가까워도 모르는 게 많다.

10년을 살고 20년을 살아도 몰랐던 게 불쑥 튀어나온다.

멀리 있을 때는 대충만 보여주지만 가까워지면 많은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같이 살고 있는 사람에게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았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다.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 의아해할 필요도 없다.

곰곰이 생각해 보라.

물건 하나를 구입할 때도 앞뒤 좌우 위아래를 보지 않는가?

한쪽 면만 보고서 잘 보았다고 하지 않는다.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져보고서 전봇대 같다고 하듯이 자기가 본 것이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가깝기 때문에 전에 보지 못했던 다른 쪽 면을 보게 된 것이다.

아무에게나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가까운 사람에게만 보여다.

나도 아직 보여주지 않은 면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모르는 것 투성이다.

내 눈으로는 가시권 안에 들어와 있는 것만 볼 수가 있고 내 귀로는 가청주파수 안에 들어와 있는 소리만 들을 수 있다.

그것도 내가 생각하는 것만 골라서 보고 듣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도 내 눈에는 다른 사람들은 안 보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보인다.

여러 사람이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시장통에서도 내 아이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린다.

과학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지만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 보이고 또 들린다.

수많은 전파가 내 옆을 지나가는데 나는 한 번도 그 전파를 잡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조그만 안테나 하나 세워놓으면 그 전파가 뭐라고 하는지 잘 들을 수 있다.

내가 본다고 듣는다고 느낀다고 해서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알 듯 알 듯 모르는 게 많은 신기한 세상이다.

그러니 모르는 것들을 배워가는 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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