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은석 May 24. 2021

정들었던 책들을 떠나보냈다


본의 아니게 집을 정리하게 됐다.

오래된 집이어서 수도관이 파열되었기 때문이다.

아랫집에 가서 보니 천정에서 물이 줄줄 떨어지고 있었다.

미안해하는 나에게 아랫집 주인은 공사를 날림으로 해서 그런 것이라며 미안해하지 말라고 했다.

그 말에 약간 위안을 받고 대대적인 수리작업에 돌입했다.

방바닥을 뜯어서 보니 파이프에 금이 간 정도가 아니고 아예 삭아서 큼직한 구멍이 나 있었다.

대대적인 공사가 이어졌다.

거의 한 달 가까이 우리 집과 아랫집의 작업이 이어졌다.


어수선한 가운데 그동안 결단하지 못했던 집 정리를 하게 된 것이다.

20년 넘게 함께 했던 책상과 책장들을 내보냈다.

아울러 그 칸칸에 채웠던 책들도 정리했다.

아끼고 아끼고 또 아꼈던 책들이다.

나중에 다시 들춰보려고 했고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는 동안 책은 누렇게 변색이 되었고 먼지만 수북이 쌓였다.




아내는 이미 여러 번 책을 정리하자고 했지만 나는 귓등으로 들었다.

다 정리하였고 남은 책들은 정말 중요한 책이라면서 고집을 부렸다.

대학 1학년 때 이미 절판된 책이라며 교수님께서 제본하라고 했던 책들도 있었다.

그때는 그렇게 책을 불법 복사해서 보기도 했다.

고이 간직했지만 이제는 보내야 했다.

대학과 대학원 시절에 봤던 책들을 몇 번 들었다 놨다 하다가 결국 놓았다.

자기계발서들과 자잘한 인문학 관련 서적들도 차곡차곡 쌓았다.

종교 관련 신앙서적들도 추려내야 했다.


내 공부방에서 이제는 아들의 공부방으로 탈바꿈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책들은 빠지고 아들의 책들을 들여야 한다.

책장이 하나 둘 셋, 결국 6개가 나갔다.

갑자기 집이 넓어졌다.

현관 앞에 쌓아둔 책들을 또 한 묶음 두 묶음 묶어냈다.

오랫동안 함께 있으면서 나의 마음을 풍요롭게 해 주었던 친구들인데 이제 이별을 고할 때가 된 것이다.




쓰레기 분리배출장에 갖다 버리는 것보다 그래도 누군가의 손에 전해지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책들을 또 따로 골랐다.

중고서점에 가서 팔자고 했다.

그래서 3분의 1은 쓰레기장행이 되었고 3분의 2는 중고서점행이 되었다.

그렇게 많이 정리했건만 여전히 책이 많았나 보다.

더 버릴 것 없냐고 묻길래 더 버릴 책이 없다고 했다.


얄팍한 두께의 시집들에 눈이 갔다.

사람도 약한 사람에게는 연민의 감정이 드는데 책도 마찬가지다.

시집들은 꼭 보듬어 주고 싶다.

김소월, 백석, 윤동주, 신경림, 천상병, 정채봉, 정호승, 김용택, 안도현, 이정하, 도종환, 나태주...

이 보물과도 같은 시집들을 어떻게 버릴 수가 있겠는가?

절대 버릴 수가 없다.


대신 미안하지만 소설들을 양보하기로 했다.

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빼고.

이병주, 조정래, 황석영, 박완서 빼고.

그전에 떠나보낸 박경리, 이외수, 공지영에게는 미안했다.




책을 떠나보낼 때면 박경리 선생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를 떠올린다.

그 제목으로 위안과 변명을 한다.

중고서점에 다녀온 아내는 10만 원 넘게 받았다고 했다.

100권은 넘게 가지고 간 것 같은데, 좋은 책들인데 가격이 얼마 안 된다니 좀 씁쓸했다.

하지만 나로서도 이미 뽑을 것은 다 뽑았다.

책 한 권에서 한 줄이라도 건지면 된다는 생각이었는데 떠나간 책들은 나에게 엄청난 지혜와 지식 그리고 삶의 통찰력들을 건네주었다.


돌이켜보면 그 책들을 만났을 때 이미 나는 헤어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떠나보내기 전에 단물 다 빨아먹으려고 했다.

책의 단물을 뺐던 빨대는 내 오른손 엄지와 검지 손가락이었다.

그 녀석들이 가장 정들었을 것 같다.

한 장 한 장마다 자기 흔적들을 남겼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정들었던 책들을 떠나보내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 두 손가락으로 꼭 쥐어주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희망도 부활도 다가오고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