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사건사고를 보면 거의 매일 홧김에 저지른 일들이 실린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툭 부딪혔는데 왜 치냐며 시비가 붙는다.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옆 테이블에서 괜히 자기를 쳐다본다며 욕설이 오고간다.
라이벌 팀끼리의 경기에서는 응원하는 사람들도 서로 편을 가르고 싸움박질을 한다.
처음에는 아주 사소한 일이었는데 그 일에 감정이 섞이고 화가 섞이면 불길처럼 확 일어난다.
참으려고 참으려고 하는데 그럴 때는 옆에서 꼭 부채질하는 사람이 있다.
“저런 걸 그냥 둬?”라며 응징해야 한다고 촐싹거린다.
그런 말까지 들으면 이제는 누구도 뜯어말릴 수 없다.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 한바탕 해야 한다.
상황이 종료되고 나면 자기가 방금 무슨 일을 한 것인지 믿기지 않는다.
‘조금만 참을 걸...’하면서 뒤늦은 후회를 하지만 되돌릴 수는 없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우듯이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나는 왜 사소한 일에 화를 낼까?’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화를 참지 말고 표출시키라는 말도 한다.
<분노하라>라는 책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마냥 참기만 했다가 화병이 되고 몸과 마음이 상할 수도 있다.
조직 내에서 화가 쌓이고 쌓이면 집단적인 분노가 된다.
사회 곳곳에 분노 현상이 너무 많다며 <분노사회>라는 책을 쓴 작가도 있다.
이런 분석들이 나온다는 것은 심각한 경고의 메시지이다.
분노를 해결하지 못하면 사회적인 갈등이 되어 폭동과 전쟁 같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그렇게 심각해지기 전에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도록 제도적인 조절 장치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분노(忿怒)라는 단어의 한자어를 파자(破字)해 보면 마음(心)이 나누인(分) 것이 ‘성낼 분(忿)’ 자이고 마음(心)의 노예(奴)가 된 것이 ‘성낼 노(怒)’ 자이다.
결국 분노란 마음이 갈라져서 감정의 노예가 된 상태이다.
화는 우리의 감정이지만 우리가 화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도리어 화가 우리를 다스린다.
고대 철학자 플라톤이 그 사실을 보여주었다.
플라톤의 노예가 심한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었다.
플라톤은 너무나 화가 나서 노예의 웃옷을 벗기고 채찍질을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손을 들어 채찍을 내려치려는 순간에 플라톤은 지금 자신이 화를 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화가 난 채로 채찍질을 하면 필요 이상으로 심하게 내려칠 것 같았다.
그래서 채찍을 손에 든 채로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플라톤의 친구가 지나가다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플라톤은 “나는 지금 화를 내고 있는 한 사내를 벌주고 있는 중이라네.”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잘못을 저지른 노예보다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이 더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는 친구에게 자기 자신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노예를 다스리겠느냐고 하였다.
플라톤은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어정쩡한 자세로 가만히 서 있는 방법을 택했다.
그 방법으로도 화가 풀리지 않자 친구에게 자기 대신에 노예에게 합리적인 벌을 내려달라고 부탁하였다.
과연 대 철학자다운 모습이었다.
스스로 노력도 하지만 자기 혼자만의 노력으로 감당하지 못할 때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화를 조절하려고 했다.
그리고 화를 내고 있는 자기 자신도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며 스스로에게도 벌을 주었다.
화는 우리의 본성이기에 그 자체로 좋다 나쁘다고 할 수가 없다.
화를 내야 할 때는 내야 한다.
분노를 표출할 때는 표출해야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좋은 방법으로,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풀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화에 휩싸여서 통제력을 놓쳐서는 안 된다.
내 본성의 주인은 바로 나다.
내 화의 주인도 나다.
내가 주인이 되어 화를 이끌지 못하면 화가 나를 끌고 다닐 것이다.
++플라톤 이야기는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화에 대하여>에 나오는 내용을 살짝 편집하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