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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Jun 23. 2021

모래알갱이 같은 사람


“바윗돌 깨뜨려 돌덩이, 돌덩이 깨뜨려 돌멩이, 돌멩이 깨뜨려 자갈돌, 자갈돌 깨뜨려 모래알.”

많이 불렀던 동요이다.

한 알이 모래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단순하게 표현하였지만 그 사이에는 기나 긴 시간이 들어있다.

거대한 바위가 수만 년 동안 눈과 비와 바람과 햇빛을 받으면서 부서지고 부서져서 모래가 된다.

물에 떠밀려 점점 내려와서 바닷가에 쌓였다.

파란 하늘과 어우러진 하얀 모래는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시원하다.


하지만 모래로 뭘 좀 해보려고 하면 금방 무너진다.

근사하게 모래성을 쌓아도 물 한 번 지나가면 무너진다.

모래 위에는 집을 지을 수도 없다.

모래를 한 움큼 손에 쥐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다 빠져나가버린다.

모래알갱이들은 워낙 개성이 강해서 서로 뭉쳐지지 않는다.

알갱이와 알갱이 사이에 틈이 너무 많아서 물 같은 것은 저장할 수도 없다.

모래알 같다는 말을 좋아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자기들끼리는 제대로 뭉치지도 못하는 모래인데 이상하게도 시멘트 가루와 함께 섞여서 물에 적시면 망치로 두드려도 잘 깨지지 않는 단단한 덩어리가 된다.

벽돌이 되고 벽이 되고 건물이 된다.

이 원리를 이용해서 사막에서도 고층건물을 짓는다.

또한 모래가 불을 만나면 흐물흐물 녹아서 유리가 되고 세라믹이 된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의 눈이 마주치는 곳마다 모래가 있는 것이다.

건물의 창문에, 천정의 전등에, 식탁의 유리잔과 식기에, 욕실의 세면대와 변기에 다 모래알갱이가 녹아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몸도 모래로 치장되어 있다.

얼굴에 낀 안경에, 손에 든 스마트폰의 액정에, 손목의 시계에 모두 모래가 녹아 있다.

현대인의 일상생활은 모래 위에서 모래와 함께 이루어진다.

모래를 싹 빼버리면 우리의 문명이라는 것도 모두 허물어진다.

모래 위의 집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모래를 빼도 무너진다.




정수기가 없었던 시절에는 물을 받아서 모래로 걸러내는 방법으로 깨끗한 물을 얻곤 했다.

치약과 샴푸와 같은 세정용품에도 모래가 들어 있다.

모래알갱이는 기껏해야 1㎜ 안팎의 작은 크기이지만 그것들이 모여서 세상을 깨끗하게 하고 내 몸을 청결하게 한다.

요모조모 쓰임새가 참 많은 것이 모래이다.


그래서 세계의 여러 기업들이 모래를 차지하려고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모래를 훔치는 도둑도 있고 모래시장을 장악하려는 마피아조직까지도 생겨났다고 한다.

너무 많은 모래를 채취해 가기 때문에 지도의 모양도 바뀌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2005년 이후 지금까지 모래 채취로 인해서 24개의 섬이 지도상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모래알갱이는 아무짝에도 쓸 모 없다고 했던 양반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분명 모래로 만든 집 안에서 모래로 만든 물건들을 꼼지락꼼지락 만지고 있을 것이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을 진리인 것처럼 여기며 살았다.

크게 될 사람은 어려서부터 모든 일을 잘할 것이라고 여겨왔다.

위인전을 보면 하나같이 어려서부터 대단했던 인물들이다.

하지만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모래알갱이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

눈에 보일락 말락 작고 약하고 볼품없다.

까칠하게 모가 나 있어서 서로 어울리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혼자서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힘도 없어서 무엇을 제대로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모래알갱이 같은 이 작은 사람들이 어쩌다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섞여서 하나가 되면 더욱 강해진다.

높이 오르는 꿈을 꾸며 그 꿈을 실현시킨다.

더 깨끗한 한 사회를 만들어간다.

자신을 내려놓고 함께 녹아지면 유리가 되어 더 밝히 볼 수 있게 한다.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지만 땅에서는 모래알갱이 같은 사람들이 반짝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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