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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Jun 20. 2021

재난은 유토피아로 올라가는 계단일 수도 있다

인류 문명의 발달은 역경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 문명, 황하 문명 모두 거대한 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단순히 강이 있다고  해서 문명이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강의 범람과 물 마름을 겪으면서 인류는 마냥 하늘만 쳐다볼 수만은 없었다.

몇 번 재난을 당하고 나니 언제든지 다시 재난이 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재난이 올 때마다 반복해서 당하기는 싫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난에 대비해서 물을 다스리는 기술들을 쌓아 나갔다.

둑을 쌓아 물을 막고 길을 열어 물을 끌어들이고 흘려보냈으며 물을 보관하여 필요할 때 사용하였다.

이런 일들은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었기에 여럿이 힘과 지혜를 모았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놀라운 기술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면서 마을이 생기고 도시가 생기고 문명이 발전하게 되었다.

역경이 문명을 만들어낸 것이다.




리베카 솔닛이란 작가는 1906년에 발생한 샌프란시스코 대지진부터 2005년 뉴올리언스에 불어닥친 허리케인 카트리나까지 지난 100년 동안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발생한 다섯 건의 대형 재난을 조사하여 <이 폐허를 응시하라>라는 책을 냈다.

단순하게 재난의 상황을 기술한 책이 아니다.

그는 재난 속에서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였는지를 보여주었다.


흔히 재난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재앙이며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매스컴이 이런 마음에 더욱 부채질을 한다.

다 끝났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솔닛은 재난 속에서 사람들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희생과 진심어린 감사를 표현하며 차별이 없는 인류애를 경험한다고 하였다.

그야말로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자 낙원의 모습을 재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는 이 모습을 ‘재난 유토피아’라고 이름 붙였다.




평상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실망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기심과 탐욕이 가득 찬 욕심꾸러기들 같다.

타인의 고통에는 관심도 없다.

남은 고통스러워 죽을 것 같은데 옆에서 고작 한다는 말이 “아이고 아프겠네. 힘들겠네,” 정도이다.

그 정도라도 표현해주는 사람은 양반이다.

대부분의 경우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


어떤 나라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이란 게 있어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면 그 사람도 책임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도덕적인 측면에서의 문제이다.

못 봤다고 하면 어떻게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이런 사람들에게서 무슨 희망을 볼 수 있을까?

하지만 대 재난이 닥치면 이런 사람들도 달라진다.


자신도 힘든 상태인데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팔을 걷어붙인다.

내 안에 잠자던 천사가 이제야 깨어났다는 듯이 착하고 선한 사람으로 돌변한다.




분명 재난은 환영할 만한 것이 아니다.

고통스러운 절규와 통곡의 눈물 그리고 상실의 아픔이 뒤섞인 생지옥의 현장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듯이 재난에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

아니 재난을 통해 긍정적인 면을 만들어낼 수 있다.

지금까지 전혀 몰랐던 우리 사회의 연약한 부분들을 보게 된다.

나 혼자만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나도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고 누군가는 나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자원봉사자로 뛰어들고 금모으기 운동에도 동참하고 질서유지에 힘쓰며 뒤처리까지 깔끔하게 끝낸다.

원래부터 천국에서 살았던 사람인양 행동한다.

다음에는 이런 재난을 경험하지 않으려고 더 좋은 시스템을 개발하고 더 좋은 문명을 만들어낸다.

재난의 잿더미 걷어내면 그 안에 유토피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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