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은석 Jul 01. 2021

확률대로 안 되는 인생


1950년 6월 25일, 평화롭기만 했던 일요일 새벽에 느닷없이 침략을 감행한 인민군은 전쟁 3일 만에 서울을 함락하였다.

인민군의 파죽지세에 대한민국은 속수무책이었고 자칫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가 될 것 같은 풍전등화의 상황이었다. 한반도 및 태평양 연안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던 미군의 입장도 굉장히 난처했다.

6월 27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맥아더 장군에게 해군과 공군을 투입해서 인민군을 즉시 격퇴하라고 명령하였다.


그 명령을 받은 맥아더 장군은 6월 29일에 비행기를 타고 한반도에 와서 인천과 수원 등 한강방어선 지역을 순찰하였다.

그리고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해군과 공군만으로는 전쟁을 치를 수 없다며 지상군을 투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더 나아가 인민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보급로를 끊어야 전쟁의 승기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미군의 여러 지휘관들은 인천상륙작전은 무모하다고 하였다.

인천 앞바다의 밀물과 썰물 때의 조수간만의 차이가 무려 7미터에 이르기 때문에 자칫 때를 잘못 맞추면 전함들이 좌초될 것이라고 하였다.

굳이 상륙작전을 펼친다면 월미도를 먼저 점령해서 배를 대야 하는데 월미도에는 전함들을 댈만한 공간이 좁다고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상륙작전이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다음은 인천에서 시가전을 벌여야 하는데 거기서 이길 가능성도 낮다고 하였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면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률이 5천 분의 1도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자 맥아더 장군은 아직은 밀어붙일 때가 아니라 기다릴 때라 생각하고 더 치밀하게 계획들을 세워나갔다.

그렇게 근 두 달을 기다린 끝에 8월 28일에 인천상륙작전을 허락받았고 운명의 9월 15일 새벽에 전함 206척, 7만여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완수하였다.




내가 아는 한 어르신은 고향이 함흥이라고 하셨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오빠와 함께 일찌감치 부산으로 피난하셨다.

막 이팔청춘을 넘긴 나이였는데 낯선 땅에서 지내기가 수월치 않았다.

이북에서 왔다는 것 때문에 서러움도 많이 당했다.

곧 내려가겠다던 어머니에 대한 소식은 감감하였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고향사람을 만나 어머니가 함흥 철수 때 내려와서 지금 거제도에 계시다는 말을 들었다.


오누이는 곧바로 어머니를 찾으러 거제도로 갔다.

하지만 그 넓은 땅에서 어머니를 찾을 확률은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았다.

며칠 동안 이 동네 저 동네 다녔지만 못 만났다.

안 계신가 보다 하고 내일이면 부산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날이 어두워 산 속 어느 집에 묵으려고 인기척을 냈다.

“계세요?”하고 묻자 안쪽에서 “뉘시우?”하면서 한 아주머니가 문을 여셨는데 세상에나!

그렇게 찾고 찾았던 어머니이셨다.




인천상륙작전이나 그 어르신이 거제도에서 어머니를 만나는 일은 확률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무모한 일, 괜히 에너지만 소비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뿐이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확률은 어디까지나 확률이다.

확률이 진리는 아니다.

확률의 수치가 높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낮다고 해서 다 실패하는 것도 아니다.


확률대로라면 나는 존재할 수도 없었다.

어머니 뱃속에서 생명이 영그는 것조차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이었다.

큰 사고 나지 않고 십대의 나이를 지나온 것,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 것, 딸과 아들을 낳아 지금껏 살아온 것들은 확률적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다.

매일 계산기를 두드리면서 수지타산을 맞춰보지만 내 계산과 맞아떨어지는 날은 거의 없다.

그래도 그런대로 살아가고 있으니 신기할 뿐이다.

어쩌면 확률이 안 맞기 때문에 인생이 더욱 흥미진진한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화를 다스리지 못하면 화가 나를 다스릴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