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제주도에서 태어나서 고등학생 때까지 줄곧 그곳에서 자랐다.
한라산에서 축구공을 차면 바다에 빠지는 그런 섬이 아니다.
내가 살던 때만 해도 45만 명에 고등학교가 30개 정도 되었다.
지금은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섬이다.
섬 둘레를 따라 꾸불꾸불한 해안도로가 놓여 있다.
운전면허를 발급받은 기념으로 한 바퀴 드라이브했던 적이 있었는데 무려 4시간이나 걸렸다.
시속 60킬로미터로.
오토바이를 타고 땅 끝까지 달려보려고 했는데 30분도 안 되어 바닷가에 다다랐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제주도 사람들이 보기에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섬사람과 육지사람이다.
섬사람은 끊임없이 뭍으로 나가기를 꿈꾼다.
머리 위로 비행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 비행기를 타고 육지로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상상을 하며 커왔다.
스무 살 때 서울에 오고 나서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 요금 5만원~”이라는 노래가 유행이었다.
대륙과 연결되어 있으나 대륙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었다.
한반도 밖으로 나가려면 바다를 건너야 하는데 그러려면 신원보증은 물론이거니와 남산 밑에 가서 안보교육도 한 시간 받아야 했다.
심지어 비행기 탈 때 지켜야 할 사항, 외국인을 만났을 때 이미지 관리법까지 교육받아야 했다.
헌법은 분명히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하였지만 우리는 철저히 갇혀 살았다.
몸만 갇힌 게 아니라 생각도 사상도 정치도 경제도 교육도 모두 모두 갇혀 있었다.
중공을 중국이라 바꿔 부를 때 즈음에 군인이 아닌 일개 시민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국민소득도 많이 올라가서 드디어 해외여행의 자유가 주어졌다.
마치 섬에서 육지로 탈출하는 기분이었다.
봇물 터지듯이 밖으로 나간 한국인이 얼마나 많은지 지금은 수백만 명에 이르고 있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지 한국인을 만날 수 있다.
나도 한동안 그 대열에 합류하였었다.
부푼 기대를 안고 비행기에 올랐었다.
이제 큰물에 나온 물고기처럼 맘껏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밖으로 나왔더니, 큰물에 나왔더니 오히려 나의 행동반경이 더 좁아졌다.
만날 수 있는 사람의 범위도 축소되었고 대화의 내용도 짧아졌다.
한국어 사용도 줄어들었고 그만큼 생각의 폭도 줄어들었다.
넓은 세상 한가운데서 ‘나’라는 작은 섬을 만들고 그 안에 갇혀 살게 되었다.
이제는 밖으로 나가는 것보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아 보였다.
썰물처럼 쫙 빠져나갔더라도 때가 되면 다시 들어오는 바닷물처럼 내 인생에도 밀물의 때가 돌아왔다.
다시 물을 건너 한국에 들어왔고 일가친지들 가까이에 자리를 잡아 살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구속하는 환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지만 막상 자유가 주어지면 그때는 다시 자신이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에리히 프롬이 말했던 <자유로부터의 도피>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냥 그곳에 있든지 돌아오든지 선택은 자기 자신이 한다.
갇혀 살더라도 내가 선택한 상황이라면 그곳에도 자유가 있다.
모든 일을 맘껏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 있더라도 내 마음은 잔뜩 웅크린 채 옴짝달싹 못할 수도 있다.
세한도를 그린 김정희, 자산어보를 기록한 정약전, 목민심서를 남긴 정약용은 출입의 자유를 뺏긴 유배지에서 그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몸은 갇혔어도 마음은 세상을 누볐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갇혀 지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비록 그때가 오더라도 나는 당당히 외치겠다.
“몸이 갇혔다고 마음도 갇힐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