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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Jul 13. 2021

문고리를 잡고 있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배고픈 조카들을 위해서 빵 하나를 훔쳤다가 5년 징역형을 받고, 탈옥을 시도하다가 형량이 19년까지 늘어난 장발장을 제대로 알고 싶어서 <레 미제라블>을 집어 들었던 적이 있었다.

간단한 책인 줄 알았다.

하지만 원문 번역에 충실한 책을 봤더니 성경책만큼이나 두꺼운 책이었다.

내용도 내가 알고 있는 빵 훔친 이야기, 신부님에게서 은 식기를 훔친 이야기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 다양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었다.

그중에서 취사선택해서 몇 이야기만 나에게 들려졌던 것이다.


책 제목을 보니 띄어쓰기가 되어 있었다.

프랑스어를 몰랐으니까 <레미제라블> 혹은 <레미 제라블>인 줄 알았다.

발음이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레 미제라블>이었다.

띄어쓰기 하나만으로도 느낌이 확 달라졌다.

‘비참한 인생’이라고 해석되었다.

‘장발장이 비참했지’ 생각하는 순간, ‘과연 누가 비참한 거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단어 하나만으로도 의미 전달이 상반될 수 있다.

똑같은 말인데 듣기 좋을 수도 있고 듣기 싫을 수도 있는 말이 있다.

“네 맘대로 해 봐!”이다.

이 말을 어떤 어투로 하느냐에 따라 상대방이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르다.

말 그대로 맘껏 원하는 대로 해 보라는 격려의 말이 될 수도 있고,

이제 더 이상 신경 안 쓸 테니까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하라는 말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막상 이런 말을 들으면 맘대로 할 수가 없다.

맘대로 한 것에 대한 책임을 누가 지느냐 하는 고민이 생기기 때문이다.


“내가 밀어줄 테니까 잘 되든 안 되든 맘대로 해 봐!”

이런 분위기라면 순풍에 돛 단 듯이 일을 벌일 수가 있다.

그런데 “네 고집이 그러니 네 맘대로 해 봐! 대신 나한테 도와달라고 하지 마!”

라는 분위기라면 위축될 수밖에 없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밀어붙이는 효과를 낸다.

말 한마디가 이중으로 사람을 속박한다.




속박한다고 하면 마치 자신의 권리를 빼앗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의기소침해질 수 있다.

그러나 속박하기 때문에 그 속박에서 빠져나오려고 더욱 기를 쓰고 노력할 수도 있다.

“그렇게 공부할 거면 때려치워!”라고 했더니 정말 공부를 때려치우는 아이도 있고, 그 말을 듣고서는 머리띠 싸매고 공부하는 아이도 있다.

말을 하다보면 저절로 짧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급할 때는 더욱 짧아진다.

주어는 너무나 쉽게 빼버리고 목적어도 서술어도 빼버린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중속박의 언어가 되어버린다.


이런 말 저런 말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중속박의 끝판왕이 되는 말은 ‘거시기!’일 것이다.

‘내 마음을 알아맞혀 봐! 말은 내가 했으니까 행동은 네가 알아서 해!’라는 말이다.

그야말로 눈치껏 알아서 해야 한다.

그러니까 하루에도 몇 번이나 거시기 소리를 듣는 전라도 사람들은 눈치가 99단은 되는 것 같다.




이중속박이 되는 말에는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렇게 저렇게 하면 좋겠어.”라고 하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줄 필요가 있다.

억양에 살짝 변화만 주어도 상대방이 이해하고 대처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말의 높낮이를 달리하고 길고 짧음의 구별을 두며 끊어 읽기만 잘 해도 의미를 잘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이다.

아무리 좋은 말이어도 꼬이게 듣는 사람이 있고 악담을 들어도 그 말을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말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장발장은 남들이 보기에는 비참한 인생 같지만 너무나 값진 인생을 살았다.

오히려 장발장을 읽는 우리에게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지 않느냐고 묻는 것 같다.

이중속박은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달려 있다.

이중속박의 문고리를 잡고 있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내가 문을 열 수도 있고 닫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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