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호구조사를 할 때면 제일 적기 난처한 항목이 있었다.
‘취미생활’ 항목이다.
한자어로 풀이해 보면 취미(趣味)는 ‘맛보기’라고 할 수 있다.
전문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고 맛보기로 하는 일 중에서 열심히 하는 일이다.
학생이 전문적으로 해야 할 일은 공부하는 일일 테고 맛보기로 하는 일, 취미생활은 공부 이외의 모든 것이 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을 골라 적으면 된다.
솔직히 아이들에게 취미가 뭐냐고 묻는 것 자체가 우습다.
아이들의 취미는 ‘놀기’이다.
그게 무슨 취미냐고 할 수 있겠지만 어른들의 취미란 것도 ‘놀기’ 아닌가?
등산? 놀기이다.
바둑? 놀기이다.
사진? 놀기 맞다.
낚시? 그건 완전히 짐 싸고 가서 노는 거다.
그런데 취미를 ‘놀기’라고 적는 아이들은 없다.
뭔가 고상한 것을 적고 싶은 게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동일한 마음이다.
그래서 폼 나게 적는 게 독서 혹은 음악감상이었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취미를 음악감상이라고 적고나면 뭔가 개운치가 않다.
내가 음악을 듣는 것은 고작 인기가요 정도였다.
감상하는 수준도 아니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가사 받아 적고 따라 부르는 게 고작이었다.
명색이 감상이라는 표현을 쓴다면 그 음악을 들으면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음악의 선율은 어떤지, 음악을 만든 배경이 되는 이야기들은 무엇인지 찾아볼 수 있어야 제대로 감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중학생 때 한 번은 음악선생님께서 눈을 감고 음악을 감상하라고 하셨다.
오케스트라단이 연주한 뭔지 모를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셨는데 다 듣고 나서 무슨 악기들로 연주한 것 같냐고 물으셨다.
낸들 아나?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을 안 했다가는 한 대 맞을 것 같아서 지목당한 친구들은 저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악기 이름을 하나씩 대는데 바빴다.
물론 나중에 지목당한 친구들은 앞의 친구가 대답한 악기를 따라 말하는 촌극을 벌였다.
그 이후로 취미생활에서 음악감상을 뺐다.
음악감상은 취미가 아니라 큰 곤혹이었다.
그런데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다시 한 번 음악 감상의 시간을 맞이했다.
방법은 똑같았다.
눈을 감고 음악을 듣는 것이다.
음악이 끝났을 때 선생님은 그 음악에 대한 설명을 해 주셨다.
선율에 맞춰서 이 부분은 집중해서 들어보라면서 온몸을 흔들며 춤을 추시듯이 지휘를 하시듯이 가르쳐주셨다.
굉장히 점잖으신 선생님이셨는데 그때는 무슨 연기를 하시는 것 같았다.
표정도 비장하셨다.
마치 큰 슬픔을 겪은 사람처럼.
그러면서도 다시 희망을 찾아가는 사람처럼 그렇게 음악 한 곡을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그리고 그 느낌을 느껴보라고 하시면서 다시 음악을 틀어주셨다.
그 후로 그 음악이 잊히지 않는다.
그 선율이 나올 때마다 비장한 감정이 솟구친다.
그 음악은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이다.
내 생애 처음으로 제대로 음악감상을 한 날이다.
언젠가 음악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에게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음악이 흘러나오면 저 음악이 누가 작곡한 무슨 곡인지 어떻게 아냐고 말이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명쾌한 대답을 해주었다.
“어렵지 않아요. 계속 듣다 보면 알 수 있어요.”
그 말을 떠올리며 음악감상에 도전해보았다.
먼저 작곡가의 삶과 음악을 만들게 된 배경을 책으로 훑었다.
그다음에는 들었다.
또 들었다.
계속 들었다.
1년에 300번 이상 들은 곡도 있었다.
거의 매일 아침마다 틀어놓았다.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 2악장 블타바>였다.
잔잔한 물이 큰 강을 이루고 큰 소리를 내기도 하고 유유히 흐르기도 하면서 온 땅을 적시는 느낌을 받았다.
나라를 빼앗긴 상태에서도
“이 강은 몰다우가 아니라 블타바이다!”
라고 외치는 작곡가 스메타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가 퍼뜩 떠올랐다.
아! 음악감상이 이런 것이구나!
++시벨리우스 <핀란디아> https://youtu.be/fE0RbPsC9uE
++스메타나 <나의 조국> 중 <블타바>https://youtu.be/l6kqu2mk-Kw